지식과 지혜의 상징, 늘 인간 곁 지키는 수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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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띠해 이야기>
▲ 내년 계사년(癸巳年)은 뱀띠해. 국립민속박물관이 띠동물 특별전 일환으로 뱀띠 기획전을 마련했다. 사진은 출품작 중 하나인 십이지도의 뱀그림.

임진년(壬辰年)이 가고 새로운 희망을 안은 계사년(癸巳年)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뱀띠’의 해이다. 뱀도 그냥 뱀이 아닌 계사년(癸巳年) ‘흑사띠의 해’, 즉 ‘검은 뱀의 해’다.

 

과거 대부분의 주거형태가 초가일 당시 집 주변에서 뱀을 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어느 집에 큰 구렁이가 집을 떠났다”는 말이 나면 마을사람들이 모두 그 집을 걱정하며 쑥덕거리곤 했다.  큰 구렁이가 담을 넘어가더라는 이야기, 지붕을 헐었는데 구렁이가 있더라는 이야기, 지킴이를 해코지 한 이후로 집이 안 되더라는 이야기 등은 이제 아련한 추억담이다. 집을 지키는 ‘지킴이’는 대체로 구렁이었다. 제주 사람들은 그 구렁이가 집을 나가면 그 집은 망한다고 믿었다.

 

그렇게 볼 때 사람과 함께 집을 지키고 생활하는 구렁이는 어쩌면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이었다.

 

원래 뱀은 용과 함께 인간의 신앙적 숭배 동물이었다. 12수호신으로 보면 여섯 번째로서 용(辰)다음이 뱀(巳)이다.
‘사(巳)’에는 ‘식물이 싹이 터서 한참 자란 시기’라는 뜻이 담겨 있어 달(月)로는 식물이 한창 자라는 때인 음력 4월을 가리키고 시간은 오전 9시에서 11시 사이를 말한다.

 

뱀은 성서에서 ‘뱀처럼 지혜로워라’라고 전하듯이 오래전부터 현명한 존재로 인식돼 왔다.  뱀은 겨울잠을 자기위해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성장할 때 허물을 벗는데 이것은 죽음으로부터 매번 재생하는 맹명을 누리는 불사(不死), 재생(再生), 영생(永生)을 상징한다. 또 뱀은 알을 많이 낳아 다산과 풍요, 재물을 의미하며 뱀의 치유력과 지혜, 예언의 능력, 끈질긴 생명력을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뱀의 해에 태어난 사람들은 음양의 귀를 동시에 열어놓기 때문에 지식과 지혜를 동시에 겸비하며 두뇌 또한 명석해 천성적으로 지능이 높고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능력도 탁월하다고 알려진다.

 

뱀은 영특한 동물이고 사람에게 먼저 해를 끼치지 않는다. 뱀은 용과 함께 영험한 힘을 가진 것으로 되어 있어 죽이거나 잡아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조선조까지만 해도 뱀을 먹는 풍습은 없었다. 뱀의 쓸개가 눈을 밝게 한다는 말이 본초강목(本草綱目)에 있기는 하나, 정력에 좋다는 속설은 뱀장수들이 만들어낸 허설이라고 한다.

 

간혹 죽음 직전의 폐병 환자가 뱀을 고아먹는 경우는 있었다. 그것은 이왕 죽을 사람이므로 마지막 죽기살기식의 독용법(毒用法)이었다고 한다. 의학적으로 독은 조금씩 써서 병을 치료하는 동종요법이라는 것이다.

 

제주지역에서도 뱀에 얽힌 신화와 전설이 다양하게 내려오고 있다.

 

# 김녕 구렁이 물리친 판관 ‘서린’

제주시 구좌읍에 있는 김녕사굴은 1962년 만장굴과 함께 천연기념물 제98호로 지정된 용암동굴로 동굴의 길이는 705m로 그리 길지는 않지만 독특하게도 3개의 지굴로 이뤄져 있다.

 

동굴내부는 S자형으로 이뤄졌는데 동굴입구는 마치 뱀의 머리처럼 크게 벌어진 반면, 내부로 들어갈수록 점점 가늘어진다.  이곳에는 역사적 실존인물을 바탕으로 한 전설이 전해져오고 있다.

 

옛날 김녕굴 안에는 성격이 매우 포악해 시시때때로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는 커다란 구렁이가 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힘센 장수를 동원해 구렁이를 죽이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화가 난 구렁이는 더욱 심하게 사람들을 괴롭혔다. 구렁이의 횡포로 살기가 힘들었던 마을 사람들은 15살에서 18살 사이의 처녀를 구렁이에게 제물로 바치는 방도를 냈다.

 

그러나 재물이 많거나 권세가 높은 양반집 규수는 한 명도 제물로 바쳐지지 않고 구렁이에게 희생되는 처녀는 모두 가난한 농부의 자식들이어서 그 폐단의 골은 점점 깊어만 갔다.

 

그러던 조선 중종 10년(1510년) ‘서린’이라는 판관이 제주목사로 부임하고, 서린은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해마다 처녀들을 구렁이 제물로 바치는 김녕마을의 소식을 듣고 김녕마을로 달려간다. 마을에 도착한 서린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자신이 구렁이를 없앨테니 무당을 불러놓고 제물을 바치는 것처럼 처녀와 술, 떡을 준비하라고 지시한다.

 

무당은 굴 앞에서 굿을 벌였고 마침 몸집이 큰 구렁이가 굴 앞에 나타나 제단에 차려진 제물을 먹어치우고 처녀를 잡아먹으려는 순간 서린은 부하들과 화살을 날려 구렁이를 죽인다.

 

무당은 서린에게 구렁이가 죽어서도 횡포를 부릴 수 있으니 제주성안에 들어갈 때까지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제주앞에 도착한 서린은 ‘이제 괜찮겠지’ 안도하며 뒤를 돌아보는 순간 붉은 섬광에 눈을 맞은 서린은 말에서 떨어져 그 자리서 죽고 말았다. 

 

# 용이 되고 싶었던 섶섬의 슬픈 뱀

 

서귀포시 보목동 앞 해발 135m의 섶섬에도 용이 되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슬픈 뱀의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옛날 섶섬에는 머리 양 옆에 귀가 달린 뱀이 있었다. 이 뱀의 소원은 용이 되는 것이었다.  뱀은 용이 되기 위해 매달 음력 초하룻날과 여드렛날 지극 정성을 다해 용이 되게해 달라고 용왕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기를 3년, 뱀의 간절한 기도는 드디어 용왕의 마음을 움직였다.

 

용왕은 용이 되어 승천하려면 구슬이 필요한데 그 구슬을 섶섬과 가까이에 있는 지귀섬 사이에 숨겨놓을 테니 구슬을 찾아 용이 되라는 말을 남긴다.  뱀은 그때부터 섶섬과 지귀섬을 오가며 구슬을 찾았지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은 어느덧 100년이 지나고 뱀은 여전히 섶섬과 지귀도 사이 바다속을 헤매다 점점 지쳐가고 결국 바다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때부터 섶섬을 중심으로 비가 내리려고 하면 섶섬 봉오리에 짙은 안개가 피어올라 주변 시야를 가리는 해괴한 조화가 일어나고 고깃배들이 마을로 돌아오다 섶섬에 부딪쳐 좌초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마을 사람들은 급기야 무당을 불러놓고 용이 되고자 했던 섶섬 뱀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한 제사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매달 음력 초사흘과 초여드렛날 조업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린다.

 

# 토산뱀과 며느리

 

예로부터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여자들은 뱀신을 섬겨왔다. 그러나 안덕면 창천리를 경계로 제주도 서쪽 지역에서는 토산의 뱀신앙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는데 여기에도 그 이유를 밝혀주는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안덕면 감산리 사람이 표선면 토산리 여자를 며느리로 데려왔다. 토산은 제주도에서 뱀신(蛇神)을 위하는 본댁(本宅)으로 여자가 시집을 가면 어느 곳이든 따라간다고 했다. 토산 며느리가 시집와서 살게 되자 집안 식구들이 병에 걸리고 여위기 시작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시댁 사람들은 점쟁이를 불러다 까닭을 물었다.

 

점쟁이는 토산뱀을 잘 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뱀신(蛇神)을 위하는 굿을 해한다고 했다. 아주 고집이 센 시댁 부친은 뱀귀신이 나오도록 굿을 하라고 한 뒤 마당에 조그만 항아리를 가져다 놓고 무당에게 뱀을 항아리에 들어가게 굿을 하라고 요구했다. 무당이 부친의 요구를 받아들여 계속 굿을 하자 뱀이 항아리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부친은 항아리 뚜껑을 닫고 깊이 땅을 파서 묻어 버렸다. 이렇게 되자 토산리 친정집에서 사람들이 아프기 시작했다. 토산에서는 점을 치고 굿을 하자 감산리에 조상이 묻혀있는 조상 때문이라고 했다.

 

토산 친정집에서는 감산리 사돈댁을 찾아가서 조상을 묻은 항아리를 내어놓으라고 간청을 했고 다시 뱀신을 토산으로 모셔갔다. 그 이후부터  서쪽에는 뱀신을 위하는 집이 없어졌다 한다.

 

뱀신들이 감산리 창천내에 가면 잡혀 묻힐 것이라 믿고 중문지경까지는 따라가지만 감산리 너머로는 따라가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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