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의 올곧은 선비 정신 예술로 승화한 역사적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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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유배지

“70평생에 벼루 열 개를 구멍 내고, 붓 천 자루를 닳아 없어지게 했다.(七十年磨穿十硏禿盡千毫)”

 

조선 후기 서예가이자 고증학, 경학, 금석학, 불교학에서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

 

그의 굴곡진 삶을 이야기할 때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제주이다.

 

조선 서예사에 길이 남을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하고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를 그리는 등 그의 예술 세계를 확립한 역사적 공간이 바로 제주이기 때문이다.

 

추사는 영조의 사위였던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1720~1758)의 증손으로,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해 성균관 대사성·이조참판 등의 벼슬을 지냈다.

 

그는 1840년(헌종 6) 55세 되던 1840년(헌종 6) 중국에 보내던 동지사(冬至使)의 부사로 임명돼 중국행을 앞두고 안동 김씨 세력과의 권력 싸움에서 밀려나 제주로 유배됐다.

 

제주 유배 초기에는 포도청의 부장인 송계순의 집에 머물다가 몇 년 뒤 대정읍 안성리 강도순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고, 이곳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

 

이 집은 1948년 제주 4·3 사건 때 불타 버리고 빈 터만 남았다가 1984년 강도순 증손의 고증을 받아 다시 지었다. 이곳이 바로 ‘추사적거지’다.

 

제주도는 추사적거지의 학술적, 문화적 가치를 인정해 2002년 4월 17일 제주도기념물로 지정했으며, 문화재청은 2007년 ‘추사유배지’로 이름을 고쳐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487호로 승격했다.

 

복원된 현재의 추사유배지는 안거리(안채), 밖거리(사랑채), 모거리(별채)로 이뤄졌다.

 

안거리는 집주인 강도순이 가족들과 생활하던 곳이다. 강도순은 추사가 제주 유배 시절 가르친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강도순네 밭을 밟지 않고는 마을을 지나갈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부유했다고 한다. 밖거리는 추사가 마을 청년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던 곳이다. “추사의 문하에는 3000명의 선비가 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문하생이 많았던 그는 제주 유배 시절에도 이곳에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모거리는 추사가 기거하던 곳이다. 그는 집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위리안치(圍籬安置)의 형을 받은 신세였다. 하지만 자신이 거처에 귤중옥(橘中屋)이란 당호를 붙이고 문학에 심취해 추사체를 완성하고 세한도 등의 작품을 남겼다.

 

추사유배지에는 추사의 삶과 학문, 예술세계를 기리기 위해 2010년 5월 개관한 ‘제주 추사관’을 중심으로 추사유배길이 조성돼 있다.

 

추사유배길은 추사의 흔적과 자취가 남아있는 서귀포시 대정과 안덕을 중심으로 유배 노정을 따라가는 3개 코스로 이뤄진 길이다.

 

1코스 ‘집념의 길’은 추사유배지를 기점으로 대정향교를 순환한다. 2코스 ‘인연의 길’은 추사유배지를 출발, 오설록까지 이어진다. 3코스 ‘사색의 길’은 대정향교에서 산방산을 거쳐 안덕계곡으로 돌아온다.

 

이 길을 통해 추사가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한 8년 3개월의 자취를 체험할 수 있다.

강민성 기자 kangms@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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