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업과 조선술 발달했던 오조리 옛 명성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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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봉, 내수면 양식장, 황근 등 천혜의 자연자원 풍부
   
(사진=오조리 올레길) 내수면을 따라 그림처럼 펼쳐진 오조리 올레길 전경.


서귀포시 성산읍 오조리는 고려 말인 1200년경 마을이 형성됐다. ‘오조(吾照)’는 성산일출봉에서 떠오른 해가 햇살을 펼치면 가장 먼저 닿는 마을이라 붙여진 지명.

1416년(태종 16년) 이웃마을인 고성리에 정의현청이 들어서면서 오조리에는 수전소(水戰所:수군기지)가 설치돼 관리와 군인들이 많이 거주했다.

성산포와 마주한 포구인 ‘오조포’는 한 때 마을 이름으로 불렸고, 조선술에 능한 목수들이 상주해 온갖 선박을 만들었다.

그래서 다른 해안마을에선 잊혀 졌거나 사용한 적도 없는 ‘적판’, ‘쌈판’ 등 옛 선박명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바닷물이 육지로 깊숙이 들어와 호수와 비슷한 내수면을 낀 이 마을은 왜구의 침략이 잦았다.

해안에 구축한 방호소 책임자인 조방장(助防將)이 백성들을 동원, 짚가리로 오름 전체를 덮어 군량미를 쌓아 둔 것처럼 위장했다.

군량미가 많으면 군사 수도 많은 법. 이 같은 기만전술에 왜구들이 상륙하지 못했다는 구전이 전해지면서 ‘식산봉’(食山峰)의 유래가 됐다.

식산봉(66m)은 작은 오름이지만 108종의 나무가 서식하는 식물의 보고다. 또 국내 최대의 황근(黃槿:노랑 무궁화) 자생지로 꼽히고 있다. 큰 나무는 높이가 5m에 달한다.

박태보 노인회장(80)은 “1980년대 농촌진흥원은 희귀식물인 황근을 널리 보급하려고 가지를 많이 꺾고 간 후 번식시켰다”며 “도내 해안가와 도로변에 뿌리 내린 황근은 식산봉의 자손”이라고 말했다.

식산봉의 황근 자생지와 상록활엽수림은 1995년 문화재로 지정, 보호를 받고 있다.

식산봉 내수면에는 ‘오조리 양어장’이 있다. 1963년 청년회가 5·16군사혁명 직후 시작된 재건국민운동의 일환으로 공사에 착수했다. 성산일출봉을 찾았던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20만원의 하사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둑 길이 182m, 높이 4.5m, 수문 2개소를 갖춘 26만㎡ 규모의 양식장은 착공 4년 후인 1967년 완공됐다. 식산봉의 흙과 돌을 날라 석축을 쌓고 성토를 하는 제방공사에는 연인원 2500여 명이 동원됐다.

변변한 장비가 없던 시절, 주민들의 피와 땀으로 양어장이 건설됐다. 맨손으로 해안가에 산재한 무거운 돌을 꺼내 외벽을 쌓던 중 발을 찧거나 허리를 다치는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1964년에는 보리 흉작으로 춘궁기가 닥치면서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돌담을 쌓는 방식으로 둑과 석축을 만들어 조성한 양식장은 47년이 지났지만 옛 방식대로 자연산 숭어와 뱀장어를 키우고 있다.

바다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오는 숭어의 습성에 맞춰 물이 들어올 때는 수문을 열었다가 썰물 때는 수문을 닫아 고기를 가둔다.

소득사업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양어장 소득이 짭짤하지가 않다. 겨울철 별미로 꼽히는 ‘참숭어’가 아닌 비린내가 나서 날로는 먹지 못하는 ‘개숭어’가 주종을 이루고 있어서다.

더구나 양어장을 마을 소유로 등기 또는 법인화하는 것을 소홀히 하는 바람에 한국자산관리공사로 소유권이 넘어가는 일이 벌어졌다.

해안과 내수면 ‘조개밭’을 따라 천혜의 아름다움을 간직해 올레 1·2코스가 개설된 오조리에는 현재 455세대, 1080명이 살고 있는 반농반어 마을. 주민들은 과거 어업과 조선술로 부흥했던 마을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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