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격변의 현대사 속 도민 위한 올곧은 목소리 울려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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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민과 함께 한 70년의 기록-광복과 제주신보의 탄생
     
   
▲ 1945년 10월 1일 제주 역사상 최초의 한글 신문인 제주신보가 창간됐다. 우리나라에서 세 번 째로 창간된 제주신보는 제주현대사 속에서 도민과 운명을 같이했으며 지금 제주일보로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은 1953년 김용부 제주신보 편집부국장(앞줄 왼쪽에서 두 번 째)이 해병제주경비사령관 감사장을 받고 기념촬영하는 모습.<제주일보 자료사진>

을미년(乙未年)인 올해는 대한민국 광복 70주년의 해이자, 제주일보 창간 70주년이 되는 해다.


1945년 나라를 찾은 흥분과 감격 속에서 언론을 통해 새 조국 건설에 이바지하기 위한 노력으로 창간된 제주일보는 도민과 애환을 함께 하며 격동의 현장을 생생하게 기록해왔다.


지난 70년간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한결같이 도민과 독자를 찾아간 제주일보의 지면은 제주현대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올 한 해 광복부터 현재의 제주가 있기까지 중요했던 순간순간을 제주일보를 중심으로 정리함으로써 미래 100년 제주시대의 초석을 다지는데 일조하고자 한다.【편집자주】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특별담화가 라디오의 잡음 속에서 생방송으로 흘러나왔다.


전날 중대 발표가 예고됐던 이날의 방송은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한다는 놀라운 내용이었다.


마침내 우리나라가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제주인에게 광복은 단순히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일본군이 옥쇄를 각오하고 제주도에서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던 상황에서 광복은 곧 ‘죽음으로부터의 탈출’을 뜻하는 것이었다.


당시 제주에서는 일본인과 극소수의 도민만 이 같은 발표를 들을 수 있었지만 광복의 소식은 곧바로 입과 입을 통해 퍼져나갔다.


광복의 흥분과 감격 속에서 뜻있는 인사들은 뭔가를 해야 한다는 조바심을 느꼈다.


제주에서 새 국가 창건을 위한 노력은 초기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인민위원회 활동으로 이어졌다.


제주도에서 인민위원회는 이념을 떠나 마을 원로를 위원장으로 추대한데다 항일투쟁의 경험자들이 주도하면서 해방 정국에서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졌고, 미군정으로부터도 상당 기간 치안활동의 협력자로 인정받았다.


비록 패망했지만 일본군은 10월 23일 제주에서 철수를 시작할 때까지 5만명에 가까운 병력이 잔주하고 있었다.


미군의 제주에 들어온 것은 광복된 지 한 달 반 가까이 지난 그 해 9월 28일이었고, 미군정이 실시된 것은 10월 27일이었다.


일본군은 미군에 의해 무장 해제된 이후에도 자위권을 위해 5%의 무기를 보유한 것을 계기로 도민들에게 행패를 부리고 모리배와 전쟁 물자를 거래해 지역경제를 혼란에 빠트렸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인민위원회의 치안대가 일제에 종사했던 경찰의 공백을 맡은 것이다.


그런데 초기 좌·우의 구별이 없어 이념의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인민위원회는 나중에 미군정과 마찰을 빚으면서 점차 좌파 성향을 띠어갔다.


특히 분단의 현실 속에서 1947년 3·1절 발포사건을 기화로 미군정과 정면 충돌하게 되면서 제주현대사는 걷잡을 수 없는 격랑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도내 첫 언론 제주신보(현 제주일보)의 탄생=광복과 함께 제주사회에서도 자주적 국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퍼져갔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 언론활동을 통해 새 조국 건설에 이바지하려는 청년들에 의해 1945년 10월 1일 제주 역사상 최초의 우리글 신문인 제주신보가 창간됐다.


제주신보는 창간때 제주민보(濟州民報)란 제호로 발행됐는데, 이는 그 해 7월부터 9월 25일까지 발간됐던 일본군의 일어판 진중신문 제호가 제주신보였기 때문이다.


미군이 제주에 진주한 지 사흘 만에 창간호를 낸 제주신보는 광복된 조국에 이바지한다는 일념 하에 발행인 등 경영체계도 갖추지 못한 채 출발했다.


일제 말기 한글 말살정책으로 인해 땅에 묻혔던 한글 활자까지 파내 하나하나 정성껏 씻고서야 신문을 만들 수 있었다.


신문은 관덕정 광장에서 열렸던 오일장에서 도민들에게 배포됐다.


오일장에 나온 도민들은 우리글로 제작된 제주신보를 받아들고 비로소 광복이 됐음을 실감했다.


제주신보는 창간호에 미군 진주, 제주 주둔 미군 사령관과 일본군 작전참모가 가진 회견을 통해 도민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보장책과 일본군의 무장 해제 및 철수 일자 등에 관한 기사 등을 다뤘다.


한국인 강제연행자 550여 명을 태운 수송선 부도환(浮島丸)이 일본 항구에서 의문의 폭발로 침몰해 탑승객 전원이 희생된 사건도 일본군에 의한 학살이라는 설이 있어 특별히 취급했다.


당시는 조국의 광복돼도 일본군 병력이 그대로 남아 있어 제주사회는 사실상 일본군 체제 하에 있는 셈이었다.


기사 내용에 불만은 품은 일본군 헌병대에 의해 창간 주역인 김용수가 강제 연행돼 밤늦도록 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처럼 출발부터 필화사건을 겪은 제주신보의 앞길에는 제주현대사의 역정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4·3때는 편집국 간부들이 희생됐는가 하면 서북청년단에 이어 계엄군사령부에 신문사가 접수되고, 부도 사태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일보, 동아일보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창간된 제주신보는 격변의 제주현대사 속에서 숱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도민과 운명을 같이하며 오늘날 제주일보로 면면히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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