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초대 행정도지사 박경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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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체제 확립 위해 민생 수습에 역점
3.1사건 후 사표...퇴임 후 좌익 동조자 몰려 곤욕 치르기도
   

초대 도지사 박경훈 도제 실시와 함께 초대 도지사에 임명된 박경훈 지사는 37세의 나이에 도지사라는 중책을 맏게 됐다.

 

제주도 최대 거부(巨富)인 박종실의 아들이었던 박 지사는 당시 경성제대를 나와 호남은행 광주본점에 재직하고 있었다.

 

박 지사는 1909년 박종실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경성공립중학교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했다.

 

1946년 2월 제주도사로 부임한 박 지사는 그해 6월 제주도의 도제 승격이 미군정 법령에 의해 발표되면서 초대 도지사로 발령됐다.

 

박 지사는 도정 방침을 ‘행정체제 확립’으로 정하고 민생 수습과 도민 안정에 역점을 뒀다.

 

박 지사는 제주도의 심각한 식량난 해결을 위해 산지항에 있는 제주주정공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주정용 고구마를 풀어 주민들의 식량 대용으로 배급되도록 했고, 1947년에는 전기의 제한송전 불편을 해결하기 위해서 부단하게 노력했다.

 

특히 일본이 어승생에 수력발전소를 설치하려 했던 사실을 알고 부족한 전기사정을 해결하기 위해 어승생 수력발전소 설치계획을 정부에 건의하기로 했다.

 

박 지사는 1935년 조직됐다가 해산된 제주상공회 부활에도 앞장섰으며 관광객 유치를 위해 한라산에도 케이블카를 설치한다는 계획을 세워 제주 출신 재일동포들의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하지만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식 직후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발포사건이 발생해 주민 6명이 숨지고 8명이 부상당하면서 일선 행정기관과 직장별로 파업투쟁위원회가 구성되는 등 제주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결국 박 지사는 3월 말 미군정청에 사퇴 의사를 밝혔고 다음 달 9일 사표가 수리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박 지사는 퇴임 이후 좌익 동조자로 몰려 투옥되는 등 상당한 곤욕을 치렀다.

 

박 지사는 1947년 10월 제주신보를 인수, 사장으로 취임하는 등 왕성한 사회활동을 벌였지만 1948년 초 불온전단 인쇄사건에 다시 연루되면서 구속됐다가 무혐의로 풀려나기도 했다.

 

박 지사는 이후 1949년 서울에서 임시 거처하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에서 생활했고, 1966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가업을 잇기 위해 제주로 내려와 거주하다 1973년 3월 5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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