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정부 지원과 도민 희생으로 도로 근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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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의 혁명, 일주도로 포장
   
▲ 1961년 5.16쿠데타로 등장한 군사정권은 제주지역의 도로 포장과 개발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사진은 일주도로 포장 공사 장면.<자료 제공=제주특별자치도>

1961년 9월 21일 제주지역 기관장과 유지들이 제주시 동부두로 몰려들었다.

 

언제가 될지 기약 없던 제주도의 도로 포장사업이 마침내 현실이 돼 비로소 첫 삽을 뜨게 됐기 때문이다.

 

이날 포장이 시작된 곳은 제주항~제주비행장 구간으로, 서울의 삼부토건이 맡아 진행했다.

 

이처럼 제주시 시가지부터 포장공사가 착수됨으로써 비로소 제주도는 ‘생활의 혈맥’인 도로 근대화를 추진해 나갈 수 있게 됐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현역 해군제독 신분으로 제주도지사에 임명된 김영관 준장은 부임 하자마자 의욕적으로 제주 개발에 매달렸다.

 

그는 부임한 지 한 달 후 한신 내무부 장관이 제주를 방문한다는 전갈을 받고 일주도로와 횡단도로를 동시에 포장한다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세웠다.

 

한 장관을 수행한 내무부 도로과장은 경제적 효과를 들어 이 같은 계획에 난색을 표명했다.

 

정부에서는 하루 차량 통행 대수가 880대 정도 돼야 포장 효과가 난다고 분석하고 포장을 지원하는 상황이었는데, 당시 제주도내 차량 대수는 300대에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혁명정신을 강조한 김 지사의 주장은 한 장관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김 지사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다각적인 대중앙 로비를 벌여 나갔지만 예산 형편상 일주도로와 횡단도로를 한꺼번에 포장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우선순위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자 김 지사는 제주시지역을 포장한 다음 횡단도로를 우선 포장하기로 결정했고,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내도 시 제주 개발에 대한 관심을 끌어낼 수 있었다.

 

내무부가 공사를 위해 대여한 채석기, 롤러 등의 중장비는 김 지사가 해군본부와 절충해 해군 LST편으로 운송해 왔다.

 

도로 포장은 골재를 깔아 기층을 다지고 콜타르를 뿌려 침투시키는 방법으로 진행됐다.

 

도로 포장사업이 착수된 후 횡단도로는 급속하게 추진됐지만 제주의 주 동맥인 일주도로는 연차사업으로 조금씩 추진돼 언제 완공 될지 모르는 형편이었다.

 

전체 181㎞ 구간 중 1961년부터 1969년까지 읍·면 소재지 및 주요 구간 61㎞가 포장된 데 불과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1970년 초 제주를 연두 순시한 박정희 대통령은 ‘지금처럼 투자하다가는 30년이 지나야 도로가 완공되고 이미 포장된 도로는 파손될 것’이라며 서둘러 연내 완공하도록 관계 장관에게 지시했다.

 

이에 따라 구간 포장으로 ‘거북이걸음’이던 일주도로 포장공사는 활기를 띠었고, 그해 말까지 전면 포장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일주도로가 포장됨으로써 그동안 제주도를 일주하는데 버스로 12시간 넘게 걸리던 시간이 절반으로 단축됐다.

 

주행비용 절감, 이용자의 쾌적도 증대, 화물 파손 감소 등 직접적 경제효과 외에 인구 분산, 생산 및 수송 계획 합리화, 지역특화산업 유치, 관광 발전 등 간접적 효과도 누리게 됨으로써 도민의 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게 됐다.

 

이 밖에 제2횡단도로(1100도로), 중산간도로 등 각종 도로가 5·16 이후 개설·보수됐다.

 

이로써 제주도는 해안이나 중산간 지역 할 것 없이 넓고 곧은 길이 사방으로 터져 향후 개발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

 

▲도민들의 땀과 희생의 산물=제주의 동맥인 일주도로는 이처럼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포장됐다.
더불어 도로가 개설된 일제시대부터 포장이 완료될 때까지 도민들의 땀과 희생이 배어 있는 도로이기도 했다.

 

일주도로를 포장하면서 도로에 깔 골재를 운반하는 것은 도민들의 몫이었다. 초등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도로 공사장에 나와 자갈과 모래를 날랐다.

 

1970년 말까지 일주도로 181.153㎞를 너비 4m로 포장하는 데 총 9억8876만원이 투입됐는데, 주민 노력 부담이 3분의 1에 가까운 2억7717만원에 달했다.

 

이 같은 주민들의 모습은 박 대통령이 주재하는 경제동향보고회의에서 여러 번 상영돼 지역세에 비해 지나치게 제주도에 우선 투자한다는 장관들의 불평을 봉쇄하는 무기로 사용됐다.

 

또한 도로 포장을 희망하는 지역에 대해서는 제주도의 이 같은 사례가 본보기가 돼 주민들의 정부에 대한 협조 의지를 가늠하는 척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1차 포장공사가 끝난 후인 1972년 일주도로의 너비가 너무 좁아 국제관광지로서의 교통량을 수용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새마을사업에 편입시켜 1974년까지 도로 확장공사에 나섰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토지 보상비 마련이 힘 들자 무보상 원칙을 세워 도민들이 자체적으로 토지를 내놓고 노력까지 부담하도록 했다.

 

결국 제주의 일주도로는 1974년 도민들의 희생적인 노력으로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다.

 

한편 당초 181.153㎞였던 일주도로는 보수 과정에서 굴곡을 곧게 펴면서 총 연장이 1990년 178.171㎞, 1999년 말에는 176.5㎞로 5㎞ 가량 짧아졌다.
홍성배 기자 andhong@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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