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제주 개발의 신호탄 신제주 개발 공사 착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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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행정 실시 30돌-본격적인 카페리 시대 개막
   

도제 실시 30주년을 맞은 1976년 제주는 인구와 식량 생산 등 각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거뒀고, 1977년에는 제주지역 본격 개발의 신호탄이 된 신제주 개발이 시작됐으며 카페리가 취항하면서 제주 해운사를 새로 섰다.

 

▲도제 실시 30주년 발전상=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은 제주도민들이 가장 열망한 것은 지방행정의 수행이었다.

 

이해 10월에는 제주지역 유지들이 도제실시추진위원회를 결성해 도 승격 운동을 추진했고, 마침내 1946년 8월 1일부터 제주도에 도제가 실시됐다.

 

이로부터 30년이 지난 1976년 제주도는 모든 분야에서 발전을 거듭했다. 도제 실시 당시 26만6419명에 불과했던 인구는 41만2021명으로 늘었고, 식량 생산량은 3만7000t에서 16만t으로 급증했다.

 

소득의 주종을 이룬 감귤을 비롯해 유채, 맥주맥 등의 경제 작물이 새롭게 재배되면서 주민 소득은 24억9400만원에서 935억3300만원으로 놀라운 성장을 보였다.

 

▲신제주 개발=제주지역 개발의 신호탄이 된 신제주 개발이 1977년 초 본격화됐다. 당초 정부의 농지 확대 보전정책에 밀려 백지화됐던 신제주 조성 계획이 1977년 초 재검토됐고, 2월 5일에는 건설 계획이 확정됐다.

 

제주도의 신제주 입주자 희망 조사에서는 20여 개 공공기관과 사회단체가 이설하기로 했으며 1000여 세대의 일반 주민이 입주를 희망했다. 이어 4월 26일에는 신제주 개발 기공식이 열렸다. 제주일보의 전신인 濟州新聞(제주신문)은 같은 날 ‘新濟州 공사 착공’이라는 제목으로 “값이 싼 택지를 공급하면서 기성 시가지의 상승 지가를 억제하고 지역간의 균형 발전을 꾀한 신제주 건설공사가 26일 상오 10시 현지에서 기공됐다”고 보도했다.

 

1978년 말 완공된 1차 지구는 일반용지 29만8347평, 공공용지 13만1465평이었고, 2차 지구 17만3000여 평에 대한 구획정리사업은 1980년 4월에 착공돼 1982년 말 준공됐다.

 

신제주 개발과 함께 278세대의 제원아파트가 1978년 7월 준공되면서 제주지역도 본격적인 아파트 시대가 도래했다.

 

▲카페리 취항=제주 해운사의 새 전기를 마련한 카페리 취항이 이뤄진 것도 1977년이다. 1977년 4월 14일자 濟州新聞은 “제주~부산간 카페리인 동양고속 제1호 취항식이 14일 하오 2시 제주항 종합여객터미널 광장에서 열렸다.

 

카페리는 3800t, 속력 18노트(제주~부산 10시간), 승객 정원 671명, 화물 적재량 300t(포니 자동차 123대)인 전천후 호화 쾌속 여객선으로 특등은 2만5000원, 1등 침대는 9000원, 2등 침대는 7000원, 2등 객실 운임은 4000원이고, 제주 출발은 매주 화, 목, 토 하오 7시다”라고 보도했다.

 

제주에 본격적인 카페리 시대가 개막되면서 기존 여객선의 이용 하락세가 이어졌다. 1977년 6월 제주지방항만관리청이 밝힌 카페리 취항 이후 5월 31일까지 제주~부산 항로의 여객 수송 실적을 보면 카페리가 전체 63%인 2만2625명을 차지한 반면 기존 여객선인 아리랑호(918t급)는 18%인 6892명, 도라지호(890t급)는 19%인 7288명에 그쳤다.

 

또 화물도 카페리는 전체 1만985t 중 51%를 차지했고, 아리랑호는 26%, 도라지호는 23%에 그치면서 기존 여객선 업체들이 적자를 면치 못했다.

 

김대영 기자 kimdy@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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