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액션배우 꿈 대신 음식으로 美서 성공시대 '활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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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식업 사업가 강대희 대표...어려운 역경 딛고 뉴욕.뉴저지서 한국 음식점 10여 개 경영
   
미국 뉴욕과 뉴저지 일대에서 10여 곳의 한국 음식점 등 경영하면서 요식업 사업가로 성공한 강대희 대표가 LA 등으로의 프랜차이즈 사업 확대 계획을 얘기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서귀포시 표선면 출신으로 미국 뉴욕에서 요식업 사업가로 성공한 강대희 대표(66)는 그의 말대로 빈털터리로 시작해 나름대로 아메리카 드림을 일궈낸 ‘글로벌 제주인’이다. 뉴욕에서 만난 그는 “자신보다 고생한 사람이 더 많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지금까지 걸어온 특이한 이력들을 보면 그의 열정과 노력, 자신감이 성공을 이끈 원동력임을 말해준다.

▲어렸을 때부터 시작된 자신과의 싸움=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강대희는 어린 시절부터 생계를 위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만 했다. 갓난 아이였던 2살때 어머니를 잃은 데 이어 제주도립병원 외과과장 출신인 아버지 역시 초등학교를 다니던 12살때 돌아가시면서 말 그대로 혈혈단신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일찌감치 부모를 모두 잃은 소년 강대희는 자존심을 잃지 않기 위해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배운 태권도는 자칫 나쁜 길로 빠질 수 있는 위기를 슬기롭게 이겨낸 힘이자 20대에 액션배우로 발탁되는 기회를 잡은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학교에 내는 회비를 제때 못낼 정도로 어려워진 생활 형편은 소년 강대희에게 먹고 살기 위해 공사 현장에까지 가리지 않고 뛰어들게 만드는 생존법을 요구했다. 이에 표선농고를 다니던 고등학교 시절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중산간 도로 공사판에서 일하는가 하면 졸업을 전후해서는 부산으로 올라가 입석버스 차장으로 일하면서 생활고를 이겨냈다.

낯선 부산에서 나홀로 일해야 하는 차장 생활은 힘겨웠던 고난의 연속이었다.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버스 안에서 2~3시간을 자면서 숙박을 해결해야 했으며 버스비를 내지 않는 이용객들과 잦은 싸움까지 해야 했다.

이처럼 어릴 때부터 갖은 역경을 몸으로 이겨낸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신념과 자신감에 찬 도전정신을 가진 청년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액션 배우의 길을 걷다=20대 들어 군에 입대한 후 월남전에 자원 참전해 군복무를 마친 청년 강대희는 선배의 권유로 합기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뜻밖의 기회를 잡게 된다.

함께 운동하던 중앙대 연극영화과 출신 친구의 추천으로 합동영화사의 공개오디션 모집에 참가, 수백여 명의 경쟁을 뚫고 당당하게 주연으로 발탁되면서 영화배우라는 새로운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당시 영화 ‘무장해제’의 주인공이었던 25살 청년 강대희는 거침없었다. 대역을 쓰지 않고 고층 건물서 뛰어내리는 등의 촬영 과정에서 열네 바늘을 꿰매는 상처도 입었지만 액션 연기에 몰입하면서 호평을 받았다. 이에 충무로에서 잇단 러브콜을 받으며 영화 ‘감빵’에서도 주연으로 열연하면서 신인 액션배우로 떠올랐다.

더 큰 기회는 바로 찾아왔다. 그의 영화를 본 미국의 워너브러더스에서 ‘이소룡 일대기’ 영화 제작을 위한 이소룡역의 유력한 후보로 그를 지목, 오디션을 보기 위해 미국으로 초청한 것. 한국 배우로서는 처음으로 헐리우드 영화의 주연 진출이라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은 그는 부푼 마음으로 1975년 LA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오디션 결과 액션 연기는 인정받았지만 언어 소통 문제로 더빙을 해야 하는 등의 난관에 부딪힌 끝에 결국 헐리우드 진출은 없던 일로 됐다. 그러나 이후 미국·스페인 합작영화 ‘The Year of Dragon’에서 주연배우를 맡아 열연을 펼치며 해외 작품의 꿈을 이뤘다.

   
강대희 대표가 경영하는 고기전문점(사진 위)은 뉴욕 퀸즈 플러싱 한인타운에 자리잡아 중국인 등에게도 인기를 끌고 있으며 뉴저지에 있는 중식당(사진 아래)도 인근 지역 주민등에게 유명한 음식점으로 자리잡았다.
▲뉴욕에서 터전을 일구다=이후 영화의 꿈을 접게 된 그는 미국에 정착하기로 결심하고 뉴욕에서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섰다. 어릴 때부터 산전수전을 겪은 터라 태권도 사범을 시작으로 야채가게와 슈퍼 종업원 등으로 일하는 미국 현지 생활은 빨리 적응할 수 있었지만 하루 16시간씩 일해야 하는 노동 강도는 힘들 수밖에 없었다.

억척스럽게 일한 결과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게 된 그는 영화배우 출신에 대한 주변의 관심에 힘입어 단기간에 자리를 잡게 됐고, 후배의 소개로 항공기 승무원이었던 9살 연하의 아내를 만나 결혼해 가정까지 꾸리게 됐다.

결혼 후 태권도 도장보다 서비스업을 해보자는 아내의 권유로 1980년대 중반 이후 업종을 바꿔 요식업에 뛰어든 그는 뉴욕의 중심지 맨해튼 35번가에서 한식 음식점인 ‘한성식당’ 운영을 시작한 후 직영 점포를 확장하며 사업가로 변신하는데 성공했다.

그가 현재 뉴욕과 뉴저지 일대 등에서 운영하고 있는 음식점은 중식당 ‘동천홍’을 비롯해 고기전문점 ‘신마포갈매기’, 쌀국수 및 샤브샤브 전문점, 낙지전문점, 분식전문점 등 10곳에 이르고 있다. 이들 음식점에서 일하는 종업원만 250명 규모로, 웬만한 중소기업을 웃도는 매출을 올리고 있다.

▲계속되는 도전과 열정=사실상 맨몸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자수성가해 아메리카 드림을 이룬 그의 성공비결은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는 특화된 음식과 끊임없이 도전하는 노력과 열정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여러가지 메뉴보다는 한가지 메뉴로 특화된 전문 음식점이 재료비와 인건비 등에서 효율성이 있다고 보고, 한국에서 인기있는 맛집과 프랜차이즈 음식점 등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가장 한국적인 맛을 살려 미국 소비자의 입맛을 공략하는 경영 전략을 통해 사업을 확장시켜 나갔다.

특히 한국 음식의 맛을 살리기 위해 식자재와 양념 등을 한국에서 공수하는가 하면 음식점 인테리어 등의 비용 절감을 위해 건축회사도 직접 운영할 정도로 공격적인 경영에 나서고 있다.

이에 힘입어 지난해 뉴저지 포트리와 뉴욕 퀸즈 플러싱 다운타운에 낚지 전문점과 고기 전문점을 잇따라 개업한 그는 뉴욕 뿐만 아니라 LA 등으로 프랜차이즈 시장을 넓히기 위한 또다른 도전에 나서 올해 7곳의 매장 확대를 목표로 뛰고 있다.

그는 “나이를 떠나 열정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냐가 중요하다”며 “미국 상류층을 겨냥한 고급화 전략으로 최고급 음식점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고향 제주와 뉴욕 한인사회 활동=미국의 최대 도시인 뉴욕에서 요식업 사업가로 탄탄하게 뿌리를 내린 그는 고향 제주와 뉴욕 한인사회를 위해서도 적극적이고 다각적인 활동을 벌여왔다.

1994년부터 재미제주도민회 활동을 시작한 그는 도민회장학회 이사장을 맡아 장학기금을 조성해 인재 육성에 기여하는가 하면 뉴욕 등지에서 열린 제주향토물산전과 감귤 판촉 행사 등을 물심양면 지원하면서 미국과 제주도간 교류 협력에도 한 몫을 했다.

영화배우 출신으로서 뉴욕한인영화인협회장도 맡아 한국영화의 미국 진출을 위한 교두보 역할을 자처하는가 하면 하버드 의과대학 태권도단 심사위원 활동과 태권도장 운영 등으로 미국사회에 태권도를 전파하는 데도 이바지했다. 또 한미 상공회의소 이사로 활동하는 등 뉴욕 한인사회에서 제주인의 위상을 높인 공로 등을 인정받아 2013년 제주도문화상(국외 재외도민 부문)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강대희 대표는 “고향 제주가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고 자랑스럽다”며 “여건이 되면 어려웠던 인생 경험을 되새기면서 고향에서 장학사업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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