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제주 섬 소년'서 '무역 사업가'로 끝없는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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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하 前 미국 뉴저지경제인협회장...세계 무대로 활동하며 한인 경제인 자립화 기반 마련 한 몫

 

제주 출신인 고용하 전 미국 뉴저지경제인협회장이 뉴저지에서 가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각종 경제단체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배경 등을 설명하고 있다.

‘저 바다 건너 편에는 뭐가 있을까? 분명 더 크고 넓은 미지의 세상이 펼쳐져 있을꺼야.’

호기심이 많았던 소년 고용하는 파랗게 빛나는 김녕 앞바다를 바라볼 때마다 꿈에 부풀었다. 제주시 구좌읍 동김녕리에서 태어난 그에게 고향 바다는 ‘세계로 향하는 창’이었다. 수평선 끝자락에서 새롭게 펼쳐질 세계에 대한 기대감은 어릴 때부터 더 큰 자아 성취를 위해 노력하게 만드는 자양분으로 작용했다.

▲바다를 보며 꿈을 키우다=김녕초등학교와 김녕중학교를 거쳐 오현고등학교에서 학업에 열중하며 포부를 키우던 그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후 외무공무원을 목표로 세계로 향한 꿈을 실현시키기 위한 도전에 나섰다.

하지만 임용을 앞둔 과정에서 실시되는 신원 조회에서 4·3 사건에 휘말려 일본으로 건너간 친척 등과 연루됐다는 이유로 번번이 떨어졌다. 당시 세계를 꿈꾸는 그에서 이른바 ‘연좌제’의 굴레는 커다란 상심감을 가져다준 뼈아픈 상처로 남았다.

어쩔 수 없이 외무공무원의 꿈을 접어야 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1974년 정부에서 출자한 비영리 무역진흥기관인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현재 코트라·KOTRA)에 당당히 공채로 합격, 수출 지원업무를 맡으면서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코트라 조사부와 기획부에서 수출보고서를 쓰고 기본운영계획을 수립하는 등 쉴틈 없이 일하면서 경력을 쌓던 그는 1979년 뉴욕무역관으로 발령받아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해외에서의 객지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새로운 도전, 무역에 뛰어들다=세계 무역과 금융 중심지인 뉴욕에서 근무하게 된 그는 우리나라의 수출상품인 완구와 운동복 등을 현지 바이어와 세계 각국의 수입상 등에게 홍보하는 전시회를 매년 10~20여 차례 기획하는 등 조국의 수출 증대에 한 몫을 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렸다.

그렇게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실력과 인맥이 쌓이면서 무역 전문가에 대한 꿈도 커져갔다. 무엇보다 장남으로서 고향에 있는 부모님을 도와줘야 하는 현실적인 고민 끝에 그는 인생의 전환점을 선택했다. 코트라 무역관 생활을 그만두고 개인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1982년 에이전트 형태의 무역 및 수입 판매 등의 사업을 시작한 그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완구류와 전구류, 모자 등을 취급하면서 시장 확대에 주력했다. 무엇보다 그동안 축적된 바이어와 마케팅 분야에서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고 있어 성공에 대한 자신감이 넘쳤다.

하지만 문제는 제품 확보와 자금력이었다. 새로 시작한 신생업체에게 제품을 맡기는 생산업체를 찾지 못해 속을 태웠는가 하면 자금력도 부족한 경영 여건 등으로 말 그대로 바닥에서부터 출발했다.

그렇게 고생한 끝에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각종 전기자재를 수입해 공급하는 종합업체인 ‘Kohan Trading’을 설립해 운영하는 기반을 갖춰 400만~500만 달러 이상의 무역 규모를 성사시키는 결실을 맺게 됐다.

2002년 당시 뉴저지경제인협회장 취임식에서 기념 촬영하고 있는 고용하 전 회장(사진위·앞줄 오른쪽서 두 번째). 2004년 세계한인무역협회에서 개최한 평양 무역상담회에 참석한 고용하 전 회장.(사진 아래)

▲도전과 열정은 끝이 없다=무역업과 자재상을 결합시킨 전기자재업이 성공을 거뒀지만 무역업에 전념하기 위해 잘 나가던 자재상 부문을 팔고, 1980년대 중반 이후 바이어와 셀러를 중개해주는 오퍼상 회사를 차리게 됐다. 오퍼상을 운영하면서 대우와 진로상사 등 대기업과 계약이 이뤄져 700만 달러 이상의 단일 거래도 취급할 정도로 규모를 키웠다.

하지만 이 시점을 전후해 우리나라 수출산업 구조가 개편되고 대기업 중심 메이저 컴퍼니의 시장 독과점과 경쟁력을 갖춘 대형 유통업체 진출 등의 교역시장 여건 변화가 빠르게 이뤄지면서 무역업에서 중소기업은 설 자리를 잃어갔다.

이같이 급변하는 시장 상황은 그가 운영하는 회사에도 영향력을 미치면서 사업을 위축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그는 무역업에 잔뼈가 굵은 노하우를 살려 1998년부터 수출과 수입을 병행하는 ‘Amstrong Corp’를 설립해 현재까지 한국과 일본, 미국 등을 오가며 과일류와 식품류, 수산물 등을 취급하는 무역 사업가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으로 건너간 지 어느덧 37년. 고희를 앞둔 그는 자신만의 연륜과 노하우를 살리기 위한 새로운 시니어 창업을 구상하고 있다. 그동안 경제활동을 하면서 쌓아온 노하우를 살려 한국의 중소기업이나 기술자들의 미국 진출 등을 성공적으로 도와주는 컨설팅 전문가로의 변신이 그것이다.

그는 끊임없는 도전에 대해 여전히 식지 않은 열정이 있기에 가능하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시대 흐름을 알고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열정이 중요하다고 그는 거듭 강조했다.

▲한인사회 발전을 이끌다=코트라 뉴욕무역관에서 근무할 시절부터 그는 경제단체를 만들거나 참여하는 다양한 사회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 한인사회 발전을 이끌고 한인 경제인의 권익 신장을 위해 노력해왔다.

1980년대 초에는 뉴욕에서 무역업을 하는 현지법인과 한국 지사 등으로 구성된 뉴욕지상사협의회(미 한인상공회의소 전신)의 자문위원을 맡아 수입 관세 문제 등을 지도하면서 자립 기반을 갖추는 데 도움을 줬다.

1980년대 후반에는 뉴욕한인건설협회 창립위원을 역임하면서 뉴욕 한인사회의 건설인들을 단결시키는 데 공헌했으며 뉴욕한인회 회관 운영 간사장도 맡아 뉴욕 한인사회 발전에도 한 몫을 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뉴저지경제인협회장을 맡아 지역 내 한인 경제인들의 자립화를 위한 기반을 닦았다. 이를 위해 그는 주지사 등을 직접 만나 각종 애로사항에 대해 건의하는가 하면 세계한인무역인협회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한인 경제인들과의 교류 협력 활성화에도 힘썼다.

또 재미제주도민회를 이끌며 고향 제주와의 다각적인 교류 활동을 전개하고 세계한인무역인협회 상임이사 등으로 활동하면서 미국 사회에서 제주인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고향 제주를 생각하다=코트라 무역관과 무역업 등을 하면서 유럽과 중남미, 아프리카 등 전 세계를 돌아보면서 글로벌 경제에 대한 풍부한 연륜과 다각적인 경험을 갖춘 그는 제주특별자치도 투자자문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세계를 돌아보며 고향 제주의 발전 전략을 생각해 왔다는 그는 ‘그린 인더스트리’에서 미래 비전을 찾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현재 글로벌 시장 흐름을 감안할 때 제주의 청정 경쟁력을 갖춘 유기농 제품이나 천연자원을 이용한 건강 유기식품 등을 제대로 만들어 상품화하면 글로벌 제품으로서의 성공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는 게 그의 핵심적인 조언이다.

그는 특히 “제주에서 생산되는 톳은 굉장히 좋은 상품으로,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추게 되면 세계적인 음식이나 상품으로 키워나갈 필요가 있다”며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육성 방안을 주문했다.

관광 인프라 측면에서도 국제자유도시에 걸맞은 컨벤션과 테마공원 조성 등에 역점을 두고 세계 기업을 유치할 수 있는 허브산업을 육성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면서도 제주가 유일하게 갖고 있는 ‘제주만의 것’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그는 “제주에서만 들을 수 있는 제주어와 먹을 수 있는 전통음식 등은 제주가 지켜가면서 상품화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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