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인종 차별 맞서 한인타운 조성 활성화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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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생 전 재미제주도민회장...이국 땅에 고향 이름 딴 '탐라플라자' 신축 등 애향심 남달라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제주의 옛 이름을 붙여 신축한 ‘탐라플라자’ 앞에서 포즈를 취한 고정생 전 회장.
이국만리 미국에서 40년 이상 지내면서도 고향 제주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자부심을 갖고 있는 고정생 전 재미제주도민회장(69)의 인생 역정은 굴곡진 한 편의 드라마다. 말 그대로 바닥에서 출발해 혼자 모진 역경을 이겨내 자수성가한 그는 ‘의지와 불굴의 제주인’이라 할 수 있다.

▲파란만장한 어린 시절=1946년 제주시 애월읍 광령리에서 태어난 그는 두 살 때 제주도의 역사적 비극인 4·3사건으로 부모를 모두 잃는 아픔을 안고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6학년 졸업식에서 다른 친구와 달리 부모가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으면서 충격을 받고 방황이 시작됐다. 매번 집을 뛰쳐 나가고 싶은 충동과 정신적 고통에 시달려야 했던 질풍노도의 시기에 어려운 생활 형편까지 겹쳐 그를 힘들게 만들었다.

중학교 입학 후 약밥 장사에서부터 신문 배달원에 이르기까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했지만 몇 개월 간 임금을 받지 못하는 최악의 여건 속에서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급기야 일본에 있는 친척들이 공부를 시켜줄 수 있다는 말을 전해듣고 위험을 무릅쓰고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생활도 여의치 않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이른바 사상범으로 몰려 어린 나이에 형무소에 들어가 1년 간 감방 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후 1년 늦게 제주상고(현 제주중앙고)에 들어간 그는 학생회장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전국 고등학교 리더 11명에 선발되기도 했다.

▲첫 사회생활, 그리고 미국행=고교 졸업을 앞둔 1965년 제일은행에 합격, 사회생활에 첫 발을 내디딘 그는 탁월한 영업 능력으로 지점 예금고 1등 등을 휩쓸며 우수직원으로 평가받았다. 이에 일년 만에 제주도금고 출장소장으로 발탁돼 당시 1억여 원의 예산을 다루며 자산 관리 능력까지 인정받았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더하고 싶다는 꿈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마침 먼 친척으로 알고 지내던 고(故) 고광림 박사로부터 미국에 와서 공부하라는 조언을 들으면서 고민에 빠졌다. 제주 출신의 고 박사는 하버드대 법학박사를 취득해 주미 전권대사 등을 역임한 저명 인사로, 당시 센트럴주립대학 학장을 맡고 있었다.

장고 끝에 그는 과감하게 사표를 던지며 만 3년 만에 안정적인 은행원 생활을 접고 대학 진학을 향한 도전을 시작했다. 하지만 넘치는 자신감에 비해 어려운 생활 여건 상 공부는 쉽지 않았고, 결국 시험에서 낙방하는 쓰라린 좌절을 맛봐야 했다.

이에 그는 다시 미국 뉴욕에서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1971년 비행기에 올랐다. 24세 청춘에게는 백지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모험이자 인생 역전의 출발점이 됐다.

▲현실의 벽에 또 한번 부딪히다=뉴욕에서 나홀로 생활하게 된 그는 평소 영어에 자신 있었던 만큼 랭귀지코스부터 차근차근 시작하면 대학 진학은 문제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거의 생각지도 못했던 컴퓨터로 랭귀지코스 시험이 치러지면서 꼼짝할 수 없이 고등학교 과정을 밟아야 했다.

그렇게 랭귀지코스 시험에 두번 실패한 이후 느닷없이 정부에서 군에 입대하라는 소환령이 날아왔다.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 자원했다가 독자여서 가지 못했던 그에게는 당장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알고 보니 해외에 있는 고위급 자제 등 병역 미필자에 대한 대대적인 소환령이 내려진 것으로, 그 때부터 불법 체류자로 전락해 숨어 다녀야 했다.

이민국에 쫓겨야 하는 불법 체류 생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이것 저것 막일을 하다 그나마 안정적인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식당에서 하루에 5만개 정도의 그릇을 씻고 닦으면서 일해야 했고, 언제 도망쳐야 될지 모르는 긴장감 속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그렇게 헤매다 우연찮게 세라믹을 수입하는 일본 무역회사에서 일하게 됐고, 그를 좋게 본 사장의 도움으로 영주권을 획득하면서 3년 만에 자유의 신분을 되찾게 됐다.

▲부동산 사업에 뛰어들다=불법 체류 생활로 학업의 꿈을 접게 된 그는 1973년 영주권을 받은 이후 돈을 벌기 위한 부동산 사업을 계획하고 종잣돈 마련을 위해 ‘뉴스 스탠드(신문 가판대)’ 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뉴스 스탠드 사업은 대부분 유태인들이 맡아서 했는데, 돈이 없었던 그는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길거리에 있는 뉴스 스탠드 1개를 5000달러에 구입해 장사를 시작했다. 그의 사업 안목은 정확했다. 1년 만에 1만5000달러로 불어난 후 스탠드를 늘려가면서 하루에 1만부를 팔아 연간 10만달러를 벌어들이는 수확을 올렸다.

뉴스 스탠드 사업으로 종잣돈을 만든 그는 부동산 스쿨에 다니며 건물 임대 및 정부 정책 등을 공부하면서 본격적인 사업 준비에 들어갔다. 이 같은 노하우로 그는 1982년 뉴욕 한인회관 매입 당시 500여 개 후보 건물을 물색해 계약을 성사시키는가 하면 1984년 뉴욕의 중심가 맨해튼에 있는 상가 매입을 시작으로 활동 범위를 뉴저지로 옮겨 사업을 넓혀갔다.

특히 그는 뉴저지 팰리세이즈파크에 제주도의 옛 이름을 건물 명으로 사용한 상가건물 ‘탐라플라자’를 신축해 남다른 애향심을 보여줬다. 이어 지속적인 사업 확장으로 한인타운 활성화에도 기여한 그는 10여 개의 건물과 사무실 등을 소유해 연간 80만달러의 수입을 올리는 부동산 사업가로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처음에는 ‘맨 땅에 박치기’하는 말처럼 어려웠지만 ‘땅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할아버지 신조를 믿고 노력해온 게 지금의 사업을 일궈낸 밑천이 된 것 같다”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한인 인권 신장에도 앞장=어렸을 때부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다는 그는 각종 한인단체 일을 맡아 미국 한인들의 인권 신장에도 앞장서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1982년에는 제주 출신인 강익조 뉴욕한인회장을 도와 한인회에 참여하면서 한인회관 매입을 음지에서 지원했으며 1990년에는 뉴욕 한인회관 관리위원장을 맡아 어려운 상황에 빠졌던 한인회관을 정상화시켰다.

1988년에는 뉴저지 팰리세이즈파크 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아 행정부 인사 등을 만나 인종 차별에 맞서 문제 해결에 앞장서는가 하면 한인을 멸시하는 잘못된 인식과 편견을 깨는데 주력했다.

당시 일부 골프장은 한인인 경우 예약을 받지 않는가 하면 한인 밀집지역 형성 과정에서 지역 내 기존 거주민과 이주 한인 간 크고 작은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그는 화합과 상생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며 한인타운을 조성하고 한인 출신 경찰과 공무원을 배출하는데 힘썼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1993년 외무부장관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또 1979년 뉴욕 제주도민회가 출범한 때부터 임원으로 활동하고 1997년 제10대 회장을 맡아 제주인들의 복지 증진 등에도 열과 성을 다해왔다.

▲가족, 그리고 고향 제주=맨발로 시작해 숱한 역경을 딛고 부동산 사업가로 자리매김한 그는 가족과 고향 제주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밤새껏 자녀들과 인생 사는 얘기를 하며 자신을 위해 공부하는 법을 가르쳤다는 그의 장녀는 예일대 교수이며 아들과 막내 딸도 각각 골드만삭스 임원과 군 장교 외과의사로 훌륭하게 자랐다.

자식들을 키우면서 이민생활도 어느덧 40년을 훌쩍 넘겼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삶의 근원지인 고향 제주가 자리잡고 있다.

“항상 ‘제주도 ‘돌트멍’에서 왔다’고 얘기할 정도로 탐라 출신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그는 “개발 지상주의는 경계해야 하며, 제주의 좋은 공기와 싱싱한 청정성이 유지됐으면 한다”고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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