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호헌 철폐” 함성, 제주 도심에 울려 퍼지다
(22)“호헌 철폐” 함성, 제주 도심에 울려 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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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과 제주(1986~1987년)

서울대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문을 연 1987년은 장기 집권을 노리는 독재세력과 민주화를 바라는 국민 사이를 뚜렷하게 양분하면서 국민에 의해 역사의 물줄기가 바뀐 해였다.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동토로 변해 버린 한반도에 민주화의 열기를 불어넣은 이들은 전국과 제주를 막론하고 20대의 젊은 청년 학생들이었다.


박종철 추모제 행사와 함께 1987년 새 학기를 시작한 제주대는 4월 3일 4·3대자보를 붙인 학생회 간부가 4·13 호헌조치 직후 경찰에 연행되면서 중간고사 거부 등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5월 18일에는 천주교 제주교구 신부 12명이 중앙성당에서 광주 민주항쟁 추모 및 민주화를 위한 구국기도회를 연 후 단식농성에 돌입하고 연동교회에서는 박종철 추모기도회를 갖는 등 침묵하던 종교계도 나섰다.


전국적으로 전개된 6·10 시위와 최루탄을 맞은 연세대 이한열씨의 뇌사, 명동성당 농성, 6·18 최루탄 추방 가두시위 등이 이어지는 가운데 가두시위 경험이 전무했던 도내 청년 학생들의 과감한 시도가 제주에서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6월 21일 제주대 학생 100여 명이 제주시 중앙로 현대약국 앞에서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연좌농성을 시작했다.


호헌 철폐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구호에 시민들이 합세하고 대학에서 또다시 학생들이 내려오면서 제주시 남문로터리는 시위 대열로 뒤덮였는데, 제주의 민주화 운동에 있어 이 같은 경험은 처음이었다.


이날 시위는 진압 경찰 병력이 목포로 출동하는 바람에 경찰과 충돌 없이 평화적으로 진행됐다.


전날 시위로 자신감을 얻은 학생들은 22일 2000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학기말 시험 거부를 결의하고 제주시 광양로터리~사사로~중앙로~동광양로를 거쳐 중앙로터리에 다시 집결, 시국 대토론회를 개최했다.


시민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으며 시위대에 빵과 우유, 음료를 제공하는 등 제주시내는 민주화 열기로 점점 뜨거워졌다.


늦은 밤까지 시위를 벌이던 학생 가운데 100여 명은 평화 시위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중앙성당에서 철야 농성에 들어갔다.


3일째인 23일 시위는 목포에서 돌아온 진압 경찰병력의 분산을 유도하기 위해 30여 명의 제주대 별동대가 시내에서 시위를 시작했으나 학교에서 출발한 학생들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거의 대부분 경찰에 연행되고 말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뒤늦게 도착해 또다시 즉석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이 경찰에 강제 진압되면서 분노한 시민들이 가세, 시위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며 새벽까지 격렬하게 이어졌다.


6월 마지막 시위는 전국 37개 시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된 26일의 평화 대행진으로, 제주에서는 제주시와 서귀포시에서 진행됐다.


특히 서귀포시 시위는 국토 최남단 지역에서 전개됐다는 점에서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의 상징이었다.

제주시에서 1만여 명, 서귀포시에서 10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된 이날 시위에서 울려 퍼진 호헌 철폐와 직선제 개헌의 함성은 더 이상 독재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도민들의 결의이자 다짐이었다.


이날 시위에서 경찰 역시 민주화의 흐름이 대세임을 인식한 듯 진압을 자제했으며 폭동 양상으로 번지는 것만 막는 정도였다.


이 같은 흐름은 민주화를 수용하는 6·29선언으로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다.


그러나 7월 11일 이한열 추모와 정권을 규탄하는 시위가 제주시 보성시장 입구에서 시작돼 확산되던 중 공항경비대 소속 테러진압반의 과잉 진압으로 제주대생 김윤삼씨(여·당시 법학과 4)가 머리에 벽돌을 맞아 중퇴에 빠지는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제주대생 7명이 상경해 서울 기독교회관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 사무실에서 경찰의 책임을 요구하며 농성에 돌입하고 시위가 이어지는 등 제주사회는 또다시 긴장국면으로 들어섰다.


이 사건은 기독교·천주교 등 종교계와 제주대교수협의회 등이 도민 중재위원회를 구성해 중재에 들어가 경찰측의 사과와 피해 보상 등에 합의함으로써 일단락됐다.


6월 항쟁을 통해 도내에서는 첫 공개적 정치사회운동조직인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제주본부가 만들어지는 단초가 마련됐으며, 제주문화운동협의회·제주교사협의회·노동상담소·농민회·제주여민회 등 각 분야의 사회운동단체가 잇따라 생겨났다.


제주의 대학생들은 1987년 6월 최루가스의 따가운 눈물 속에서도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란 함성 속에 거리에서 도민과 소통하면서 새로운 흐름을 형성해 나갔고, 이 같은 경험은 향후 지역문제에 도민의 자주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는 밑거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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