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회사 4개로 확장···연매출 10억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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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킨에이쇼지 대표, 일본 경제 현실 파악해 경영 최대 역경 극복
부친 故 김창휘씨 이어 고향김성일 ㈜킨에이쇼지 대표고국 사랑 실천 앞장
   
김성일 ㈜킨에이쇼지 대표가 일본 도쿄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다.

▲아버지에게 고향 사랑을 배우다

 

김성일 ㈜킨에이쇼지 대표(62)는 1953년 재일교포 2세로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초·중·고등학교를 모두 일본 학교를 나왔다.

 

학창 시절 도쿄 내내 김 대표는 우에노역 인근에서 음식점과 커피숍 등 집안일을 도우며 생활했다.

 

그런데 김 대표는 학창시절 내내 부모님의 얼굴을 보기 힘들 정도였다.

 

아버지 고(故) 김창휘씨는 제주도와 일본 오사카 등지에서 찾아오는 친척들과 지인들, 때로는 처음 만나는 분들까지 제주 출신이라면 도맡아 숙식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일자리까지 제공하기 위해 동분서주했기 때문이다.

 

김 대표의 아버지인 김창휘씨는 재일본관동제주도민협회의 전신인 재일제주개발협회의 창립 멤버이자 제9대(1971년 2월~1973년 1월)와 제14대(1984년 1월~1985년 5월) 재일제주개발협회장을 역임하면서 고향 사랑에 앞장을 섰다.

 

특히 김창휘씨는 1962년 4월 당시 김영관 제주도지사의 초청으로 제주를 방문한 ‘1차 향토방문단’으로 고향을 공식 방문해 개발기금 450만환과 감귤 묘목 500본, 현미경과 의료기구 등을 제주도청에 기증하면서 재일교포의 고향 사랑에 물꼬를 트기도 했다.

 

김 대표는 “아버지는 제주 출신과 제주도, 대한민국과 관련된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앞장섰던 분이시고, 이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기도 했다”며 “이 때문에 아침 식사 시간이 아니면 아버지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는데 나중에야 제가 아버지가 하시던 일을 하다 보니 그 이유를 알게 됐다”고 회고했다.

 

 

   
일본 도쿄 다이도꾸우에노에 위치한 ㈜킨에이쇼지 빌딩 전경.

▲가업을 이어받아 역경을 극복하다

 

김 대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버지의 일을 돕게 됐다.

 

당시에는 일본인이 아니고서는 대학교를 졸업해도 일본 회사에서 취직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재일 한국인에 대한 차별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 밑에서 단순하게 회사 일을 돕는 것도 잠시, 김 대표는 30대 초반부터 경영의 일선에 서게 됐다.

 

아버지인 김창휘씨가 건강이 악화되면서 오랜 입원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김 대표는 회사를 맡은 지 5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최대의 난관에 봉착하게 됐다.

 

바로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비정상적인 자산 가치 상승으로 수많은 부호가 생겨났던 버블경제가 1991년 말 완전히 붕괴되면서 부동산 임대업이 중심이던 회사의 경영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그래도 김 대표는 평소 아버지의 사업 철학을 잊지 않고 혁신 경영을 한 결과 최대의 역경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 시대의 현실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는 경영 철학에 맞춰 기술 혁신과 원가 절감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것이었다.

 

김 대표는 “버블경제가 붕괴되자마자 일본 내에서 수많은 기업이 줄도산했고, 실업자가 급증하면서 모든 업종이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됐다”며 “그러나 당시에 기업과 일본 경제의 현실을 면밀히 파악하고 그에 맞도록 원가 절감의 노력 등을 한 결과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노력의 결과 현재 김 대표의 기업은 부동산 임대업을 중심으로 한 ㈜킨에이쇼지와 음식점 및 선술집(이자까야)을 경영하는 이찌후꾸무라다상회, 무도회장을 운영하는 글로리기획과 사까에 엔터프라이즈 등 4개의 회사로 확장해 10억엔 이상의 연매출을 올리고 있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 김 대표는 “앞으로 회사의 채무를 줄이고 더욱 건전한 경영 상태를 만들기 위해 시대의 흐름과 기업 내부의 운영 상태를 면밀하게 보고 있다”며 “이 같은 노력을 통해 더 많은 부가 쌓인다면 고향 제주와 대한민국, 그리고 한일 친선과 상호 발전을 위한 일에 쓸 생각”이라고 말했다.

 

▲아버지의 길을 따르다

 

고향과 고국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줄어드는 재일교포 2~3의 문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던 아버지 김창휘씨의 권유로 김 대표는 20대 때부터 재일관동제주도민협회의 전신인 재일제주개발협회 산하 청년회에 가입해 활동하게 됐다.

 

이후 김 대표는 청년회 소속으로 여러 가지 공연회와 유명 인사 초청 공연을 개최하는 것은 물론 제사 방법 등 우리 민족의 전통 의식을 소개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아울러 김 대표는 청년회를 통해 제주와 도쿄지역 초·중·고교생 사이의 활발한 교류에도 힘을 썼다.

 

이후 김 대표는 아버지의 병환으로 사업 경영의 전면에 서게 되면서 10여 년 동안 재일관동제주도민협회와 대한민국 민단 활동을 소홀히 하게 됐다.

 

하지만 경영이 안정화를 찾게 되자 김 대표는 다시 재일관동제주도민협회 부회장과 민단 도쿄본부 부단장을 맡으면서 고향 제주와 고국의 발전, 재일교포들의 권익 증진에 앞장서고 있다.

 

여기에 김 대표는 도쿄 분쿄꾸 한일친선협회에서 일본 학생들과 한국 학생들 사이의 다양한 교류를 진행하고 있는 한편 광산김씨 일본 도쿄지부 회장을 맡아 사라져가는 한국의 전통을 보전하는 데 노력하고 있다.

 

김 대표는 “민간교류를 활발히 해서 한국과 일본 사이의 오해를 풀고 친선을 도모하고 있다”며 “양국이 이 같은 민간교류를 통해 현재 쌓여 있는 왜곡된 역사의식을 버리고 동반성장하는 계기를 만들어 나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이어 “지금도 한일 민간교류에서 다양한 일을 하고 있지만 한국말이 서툰 게 가장 부족한 점이라고 생각한다”며 “한국말을 잘하기 위해 공부에 매진해 유창한 한국말로 한일 민간교류 분야에서 더 큰 일을 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고향 사랑을 피력하다

 

김 대표가 고향 제주를 처음 방문한 것은 1971년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목욕탕 시설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처음 제주에 방문했을 때 여관에서 한 달간 머물렀는데 너무 불편했다며 그래서 아버지가 도쿄에 있는 지인들과 재일제주개발협회를 창립하고, 활발한 고향 지원 활동을 벌인 이유를 알게 됐다고 김 대표는 회상했다.

 

지금도 1년에 여섯 번 이상 고향을 찾는 김 대표는 “최근에 제주에 가면 높은 빌딩과 호텔은 물론 관광과 관련된 다양한 시설이 마련돼 있는 것을 보면 너무 기분이 좋다”며 “앞으로도 다양한 민간교류 활동을 통해 이처럼 좋은 제주를 알려나갈 것”이라고 고향에 대한 애정을 피력했다.

 

김 대표는 특히 “제주는 자연, 해수욕 등 빼어난 자원들이 많은 만큼 관광산업이 가장 중요하다”며 “그래도 제주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더 살려야 다시 가고 싶은 곳이 될 수 있는 만큼 제주의 특성을 특화할 수 있는 종합적인 계획을 마련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도쿄=고경호 기자 uni@jejunews.com

사진 설명 : 김성일 ㈜킨에이쇼지 대표가 일본 도쿄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다.
일본 도쿄 다이도꾸우에노에 위치한 ㈜킨에이쇼지 빌딩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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