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행방묘연했던 수월봉 영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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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훼손 위기...한 주민이 밭고랑에 숨겨둬
   
풍광이 수려하고 풍수학적으로 명당인 고산리에는 조선시대 많은 유배인들이 귀양살이를 했다.

유배인 중 이도사, 임현형 등은 형기가 끝나도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서 생애를 마쳐 입도조가 됐다. 특히, 수월봉은 예로부터 ‘영(靈)’이 서려 있는 명당으로 꼽혔다.

1698년(숙종 24년) 수월봉을 마주한 제주목사 남지훈은 영산이라며 감탄을 했고, 대정현감에게 이곳에 영(靈)이 있으니 경작을 비롯해 모든 행위를 금지하도록 지시했다.

1757년(영조 33년) 수월봉 정상에는 ‘경작을 못하고, 말을 타고 갈 수 없으며, 묘를 설치할 수 없고, 방화를 금지 한다’는 내용이 새겨진 ‘영산비(靈山碑)’가 세워졌다. 일명 하마비(下馬碑) 또는 사금비(四禁碑)로 불려왔다.

그런데 일제시대 우리 사상과 신앙이 말살되면서 영산비도 사라질 위기에 놓이자 한 주민이 자기 밭도랑 깊은 곳에 숨겨뒀다. 광복을 맞이했지만 영산비는 행방이 묘연해졌다.

1996년 한 지주가 배수로를 개설하던 중 자취를 감췄던 영산비가 발견됐다.

직사각형 모양에 윗부분이 반원형인 영산비는 높이 84㎝, 너비 43㎝, 두께 10㎝로 25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비문의 마모 상태가 심각해 고산1리사무소에 보관 중이다.

현재 수월봉 정상에 있는 영산비는 모조비로 2000년 영산비건립추진위가 설치했고, 매년 3월 이곳에서 무사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수월 영산제’가 봉행되고 있다. 올해는 16회째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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