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 온 조정철과 사랑...가혹한 고문으로 숨져
조정철(1751~1831)은 정조 시해 모의 사건에 연루돼 1777년부터 27년간 제주에 유배됐다.부인과 사별한 그는 의복과 식사 수발을 도왔던 제주 여인 홍윤애와 사랑에 빠졌다. 홍윤애는 대역죄인인 그에게 기꺼이 사랑을 바쳤고, 조정철의 딸을 낳았다.
1781년 노론파 조정철의 집안과 할아버지 때부터 원수지간이었던 소론파 김시구가 제주목사로 부임하면서 이들의 사랑은 비극으로 치달았다.
김시구 목사는 홍윤애를 옥에 가둬 문초해 조정철의 죄상을 캐고자 했지만 홍윤애는 모든 사실을 부인하며 조정철을 변호했다.
그럴수록 매질은 더해졌고, 잔인한 매질로 뼈가 부서지고 근육이 끊어지면서 홍윤애는 결국 형틀에 묶인 채 죽고 말았다.
1805년(순조 5년) 사면 복권된 조정철은 유배에서 풀려났고, 1811년에는 환갑의 나이에 제주목사로 부임했다. 죄인에서 목사로 돌아오면서 제주 유배사에 가장 극적인 장면을 남겼다.
그는 열일을 제쳐 두고 홍윤애의 묘부터 찾아가 통곡한 뒤 묘비명을 짓고, 애도시를 적어 넣었다. 딸은 이미 죽고 없었고, 사위는 부임하던 해에 죽고 말았다.
목숨을 내놓고 사랑을 지킨 홍윤애를 위해 조정철은 비문에 ‘옥 같던 그대 얼굴 묻힌 지 몇 해던가. 누가 그대의 원혼을 하늘에 호소할 수 있으리…진한 피 깊이 간직하고 죽고 나도 인연이 이어졌네’라는 시를 남겼다.
홍윤애 고문치사 사건은 조정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김시구 목사는 4개월 만에 파직당해 의금부로 압송됐다.
제주판관 황인채와 대정현감 나윤록도 벼슬이 갈렸다. 정조는 수령을 잘못 추천한 죄로 이조참판 김하재를 파직했고, 홍윤애와 연관이 없던 정의현감까지 갈아 치웠다.
조선 왕조를 통틀어 제주 3읍 수령과 판관까지 교체된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홍윤애 묘는 원래 삼도1동 전농로에 있다가 1937년 제주농업학교가 들어서면서 손자인 박규팔의 무덤이 있는 애월읍 유수암리로 이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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