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유배의 시련에 최고의 예술가로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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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유배길...유배생활 중 국보급 '추사체' 완성
   
▲ 추사의 유배 모습과 업적을 조명하고 있는 추사문화예술제의 한 장면
추사 김정희(1786~1856)는 24세 때 부친이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수행해 중국 제일의 금석학자 옹방강과 완원과 교류를 하면서 금석학의 진수를 배웠다.

33세인 1819년 과거에 급제해 암행어사, 예조참의를 거쳐 1836년에는 병조참판, 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했다. 인생의 황금기는 안동 김씨 세력에 의해 저물었다.

‘윤상도 옥사’를 빌미로 추사는 6차례 혹독한 고문과 36대의 곤장을 맞고는 죽음 직전에 풀려나 대정현(대정읍)에 유배됐다.

유배 기간은 1840년부터 1849년까지 9년간 이어졌다. 55세의 느지막한 나이의 유배 생활은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조선 서예사에 길이 남을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했다.

추사는 유배를 통해 학자로서, 예술가로서 최고의 경지에 올랐고, 금석학 연구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업적을 남겼다.

2011년 개통한 추사 유배길은 1코스 집념의 길(8.6㎞), 2코스 인연의 길(8㎞), 3코스 사색의 길(10㎞) 등 3개 코스로 총 26.6㎞다. 길은 추사유배지와 대정향교를 비롯해 안덕계곡에 이르고 있다.

유배를 와서도 추사의 독서와 학구열은 왕성했다. 제자이자 역관인 이상적은 추사가 원하는 귀한 책을 청나라에서 구해 보내줬다.

추사는 1844년 제자인 이상적에게 ‘세한도(歲寒圖)’를 그려줬다. 세한이란 아주 추운 겨울 날씨를 의미하며, 추사가 자신의 신세를 빗댄 그림이다.

국보 180호인 세한도에는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가 뒤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는 발문을 적어 사제 간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은 이상적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추사는 귀양살이 동안 많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지인과 후학들에게 자신의 학문 세계를 전했다. 특히, 부인과 며느리 등과 주고받은 40통의 한글 편지는 그의 인간적 면모가 드러나는 중요한 자료로 꼽히고 있다.

조선 후기 끊어져가던 우리나라의 다도(茶道)를 정립해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초의선사는 동갑내기로 평생을 좋은 벗으로 지낸 추사를 위해 자신이 재배한 차를 보내줬다.

추사의 제자인 소치 허유는 초의선사에게 받은 차를 건네기 위해 세 차례나 제주를 방문했다.

김정희의 호는 추사(秋史) 외에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노과(老果), 농장인(農丈人),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 100개가 넘는다.

이러한 호를 도장에 새겨서 낙관들을 모아 만든 책이 ‘완당인보(阮堂印譜)’다. 제주의 제자 박혜백이 펴낸 완당인보에는 180여 개의 낙관이 찍혀 있으며, 이들 낙관은 추사 작품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 기준이 됐다.

추사는 1849년 유배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1851년 벗인 영의정 권돈인의 일에 연루됐다는 모함을 받아 또 다시 함경도 북청에 1년간 유배됐다.

권력 쟁취를 위한 모함에 넌더리가 난 추사는 말년에 경기도 과천에서 은거생활을 하다 71세에 세상을 떠났다.

추사는 “70평생에 벼루 열 개를 구멍 냈고, 붓 천 자루를 닳아 없어지게 했다”고 말한 것처럼 유배에서 겪은 시련을 통해 예술가로서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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