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웅. 칼럼니스트
인공의 온갖 것들이 획을 잃고 면을 허물고 윤곽과 형상과 빛을 놓는다. 본래성의 방전, 천지개벽하던 원초에로의 회귀다. 독특함과 개성을 벗어 버리고 하얗게 성형한 단순화와 획일의 질주, 제주는 지금 숨 가쁘게 원시로 돌아가는 중이다.
32년 만의 한파로 소리와 꿈틀거림만이 존재한다. 섬을 까불리는 매서운 바람, 바람에 흩날리는 눈보라. 바람의 음향은 들짐승의 포효를 넘고, 눈보라의 비산(飛散)이 허공을 흔들어 장악하고 있다. 섬은 꼼짝없이 옴치고 앉았다. 손도 발도 묶인 채 주의보만 생산해 낸다. 한파주의보, 강풍주의보, 대설주의보, 파랑주의보. 섬에 몰아치는 눈과 삭풍이 매섭다. 한 치의 동정심도, 물러섬도 없이 섬을 포박했다. 동서남북으로 길이 통제됐다. 너울 치며 게거품 물고 뒤집힌 바다에 배 뜰 수 없고, 찢어지게 흔들리는 공중에 비행기 날 수 없다. 순간 초속 15m 강풍에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눈 쌓인 활주로는 기능을 놓아 버렸다. 항공기 500여 편이 운항을 취소했다는 보도다. 섬에 묶인 관광객 수만 명이 공항 맨바닥에 누웠다.
단절로 가면서, 읍내 마을이 고립하려 한다. 토요일 오후, 부득이한 외출로 시내버스를 탔더니 15분 거리가 한 시간 걸렸다. 바퀴에 월동 장비를 두른 대형차가 뒤뚱거리며 갈그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밤늦은 귀갓길은 차량 몇 대만 늑장으로 기고 있었다. 어제완 전혀 다른 딴 세상이다.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 걸음걸음 발부리 끝으로 오는 눈의 저항. 눈밭을 헤치고 정류소에 이르니 교통정보 모니터가 얼어붙었다. 눈발 뻗친 구조물 안에서 다리가 저리게 기다리는데 버스가 왔다. 구세주다. 그새 눈이 엄청나게 쌓여 귀갓길은 시간이 더 걸렸다. 간신히 발을 내디딘, 눈 덮인 고샅길이 낯설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설야, 가팔라도 보안등 불빛에 흰 깁을 편 듯 눈길이 곱다.
일요일 아침,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찬연한 설경이다. 간밤의 적설 위로 눈이 내리며 쌓인다. 온 세상이 하얗다. 빛을 반사하는 흰색이 이렇게 포용적일 수가 있나. 울긋불긋 현란하던 유채색이 하얗게 단조한 무채색 속으로 녹아들었다. 눈의 흰색은 포용하면서 강제하는가.
정원이 순백의 작은 설원(雪原)이다. 철쭉이며 영산홍들이 목만 내밀었고 돌들도 머리에 잔뜩 눈을 뒤집어썼다. 돌 틈에 심은 난들은 눈 속에 묻혀 가뭇없다. 텃밭의 푸성귀들도 눈을 머리끝까지 썼다. 소철과 동백과 솔과 주목이 목을 움츠린 채 눈바람에 항거하며 휘청거리고 있다. 처절한 몸부림이다.
새의 종적이 끊어졌다. 한참 서 있었더니, 눈 속을 낮게 나는 녀석이 있다. 직박구리다. 평소의 거친 파열음이 아닌, 힘없는 저음 몇 마디 흘리며 울을 넘는 저들 한 쌍. 사흘 동안 배가 곯았을 것이다. 처진 날갯짓이 처연하다. 눈 오면 점점이 흩어지곤 하는 참새들은 지금 어느 숲에 숨었을까. 아잇적 눈 오는 날, 마당에 좁쌀을 뿌려 주던 게 생각난다. 마당에 왔으면 먹이를 보아 한 줌 뿌려 줄 것을.
밖엔 거세게 이어지는 눈. 세상은 점입가경의 순백색 은세계다. 도시와 농촌이 경계를 허물고, 빈부와 미추가 말끔히 지워졌다. 자연의 덕목이 저러한가.
눈이 보여 주는 포용과 융합과 순종의 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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