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미칠근(一米七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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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칼럼니스트
     
 

“밥은 하늘이다. 밥에서 한국인은 이상향을 찾는다.”

김지하 시인의 말이다. 밥에 대한 명징한 정의다. 공감한다. 선언적인 목소리로 말한 위대한 착상이다. 몸이 오싹해 온다. 밥에서 하늘을 보았으니 하늘인 밥을 함부로 할 수 없다.

‘일미칠근(一米七斤)’, 쌀 한 톨에 일곱 근의 땀이 배어 있다 함은 쌀의 소중함, 쌀을 허투루 대하지 말라는 경구다.

산문에 들렀다 공양 간에서 바루 체험을 한 적이 있다. 밥과 국을 담은 나무 식기(바루) 둘을 깨끗이 비우고 난 뒤, 물로 헹궈 마시고는 물기를 행주로 말끔히 닦는 것으로 끝나는 공양의식이다. 정갈했다. 밥 티 하나 남기지 않는 데다 식재료가 순전히 나물들이라 그릇에 찌꺼기 하나 눌어붙을 게 없었다.

문득 아잇적에 연을 만들던 일이 떠오른다. 대나무를 쪼개어 가오리 모양으로 휘어 놓은 다음 창호지를 붙여야 하는데, 풀칠한다고 보리밥알을 뭉개어 발랐다.

보리밥알은 워낙 헤식어 금세 떼어지고 만다. 접착력이 약했다. 연이 뜰 둥 말 둥 하더니 허망하게 추락하고 말았다. 그게 쌀 밥알이었다면 사정은 달랐을 것이다.

평소 구경도 못하다 제사 명절날에나 몇 술 받아 앉던 게 곤밥(제주 방언)이었으니 연을 만드는 데 풀칠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다.

밥그릇에 밥알을 남기면 좋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아이 때 두 아들에게 밥상머리교육으로 그릇에 밥 티 하나 남기지 말라 가르쳤다.

효과는 완벽했다. 어른이 된 뒤 밥만 아니라 국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는 걸 보며 흐뭇해 웃곤 한다.

이 밥 알 안 남기기 훈육은 손주들에게도 예외일 수 없다. 분가해 살아 밥상머리가 다르긴 하나 아들들이 잘 전수하고 있을 것으로 믿는다.

풍요의 시대라 하나 밥 귀한 줄 모르면 안된다. 쌀 한 톨에 배어 있는 농부의 땀을 생각하면 되는 일이다.

쌀 ‘米’ 자를 파자하면 八十八이 된다. 쌀 한 알을 얻는 데 88번 손이 간다고 풀이한다.

실감키 어려운 말이다. 쌀을 소홀히 하는 것은 근본을 저버리는 일이고, 근본이 무너지면 존재가 허하다. 먹고 살기 힘들던 시절의 신세타령이 아니다.

쌀에게 겸손하고 밥에게 공손해야 한다는 의미다.

아내는 조상 제사를 마흔 해 동안 모셔 왔다.

가장 머릿속에 남아 잊히지 않는 게 제삿날 신위 전에 고봉밥을 올린 것. 유기든 스테인리스 스틸이든 목제 밥사발이든 그릇 불문, 시울 넘치게 꾹꾹 눌러 담았다. 메 그릇 위로 붕긋이 솟았다. 메가 나중엔 떡처럼 굳어 제를 올리는 손이 삽시(揷匙)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어린 시절 가난이 몸에 밴 데다 조상 음덕에 감사하는 마음을 얹었으리라. 그 손 큰 덕으로 늘그막에 밥술이나 먹고 사는 건 아닌지 모른다.

이제 아내가 제사에서 손을 놓는다. 쉰을 바라보는 두 아들에게 대를 물리는 것이다. 아내의 고봉밥도 올해로 마감할 것이나, 지켜봐 온 며느리들이니 대를 이어 잘 모시리라 믿는다.

제상에 올리는 메가 반드시 고봉밥이라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제사는 정성이다. 보리밥 조밥도 없어 못 먹던 시절을 살다 가신 신위께 쌀밥 그득 떠 올림으로써 된 건 아닐지.

가만 생각해 보니, 내 윗대는 모두 ‘일미칠근’의 뜻이 뼛속 깊이 사무친 어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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