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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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상전벽해, 바람의 등에 업혀 속도를 내는 말 같다. 세상 많이 변했다.

서구화 물결이 넘실대면서 젊은 남녀의 신체적 접촉이 도를 넘는다. 드라마에서도 포옹이나 키스쯤은 별것 아니고, 베드신이 예사로운 판에 ‘사랑’이란 말쯤은 인제 심드렁 무덤덤하다.

생각이나 감정을 전달하는 게 말의 첫 번째 기능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내려오는 관습은 얼마든지 이와 다를 수 있다.

우리 선인들은 대놓고 ‘사랑’이란 말을 입에 발리지 않고, 에둘러 가며 뜸을 들였다. 고대소설 중 애정소설의 대표작 ‘춘향전’에서도 ‘사랑가’에 말고는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사랑은 싱그러우면서도 그윽하고 성스러운 것. 입을 열어 수다로 가지 않아야 한다.

말이란 쉽게 진이 빠져 한번 말하기 시작하면 빛과 향기가 흩어져 버린다. 그것은 올올이 물올라 추스르기 어려워질 때까지 고이 지녀야 할 주옥(珠玉)이다.

나이 든 이들은 한 움큼 짙은 연민의 정을 간직하고 있으려니.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을 가지고 ‘먼저 떠나요!” 하고 하소연하는 노부부를 본다. 어쩌다 자기가 먼저 세상을 뜨게 될 때, 병 든 한쪽이 겪을 외로움과 혹여 받게 될지 모를 홀대가 애처로워 염려하는 탄식이다. 쓰다듬음과 속삭임은 어디다 견줄 데 없는 간곡한 사랑의 몸짓 아닌가.

아직도 유교사회의 그늘이 스산하다. 한평생 해로하면서 귀 간지러운, ‘사랑’이라는 귀하디귀한 그 말, 시원스레 해본 적 없는 이도 더러 있을 것이다.

오래전, 성균관 야외혼례에 참례한 적이 있다. 전통혼례에선 말로 하는 혼인서약을 하지 않았다. 반지를 끼워 주는 등 신체 접촉도 일절 없었다. 신랑이 나무 기러기를 상에 놓고 절하면, 신부의 어머니가 이를 받아 가는 전안례(奠雁禮)가 처음 눈길을 끌었다. 기러기는 한 번 짝을 지으면 한눈팔지 않는다 해서 정절을 상징하는 예(禮)다.

핵심은 합근례(合?禮). 잔을 주고받아 술을 마시는 절차다. 이때 쓰는 술잔은 표주박을 둘로 쪼갠 것. 그 짝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고, 그 둘이 합쳐짐으로써 온전한 하나가 된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술 한 모금씩 입으로 가져가며 눈빛으로 하는 애틋한 사랑의 고백과 타오르는 가슴으로 하는 해로동혈(偕老同穴)의 다짐이다. 이에 더할 군더더기의 다른 무슨 말이 필요할까.

혼례에 쓴 합근박은 청실홍실로 장식해 천장에 매달아 신방을 은밀히 굽어보게 한다니 얼마나 낭만적인가. 한국판 로맨스의 원형이다.

신혼부부에게 스며드는 감동이 과연 어떨지, 무지갯빛 상상이 하늘로 치솟는다.

이성간의 사랑, 그 모습과 경위는 다를지언정 사는 동안 누구나 겪는다. 그것은 고귀한 감정이고 쉬이 얻을 수 없는 것으로, 설령 얻음에 험난하고 견딤에 힘겹다 해도 충분히 시도할 만한 가치 있는 덕목이다.

파트너십은 사랑과 신뢰의 줄기에 돋아나는 잎이다. 그런 감정이 아름답고 값진 것이지만, 입말로 마구 떠들어댈 건 아니다. 흠집이 된다.

이걸 딱하다거나, 구닥다리의 어리석음이라 해야 하나. 그 표현 방식이 보다 적극적이고 개방적으로 변했다는 걸 모르진 않는다.

그래도 ‘사랑’이란 말만은 허투루 할 게 아니라는 생각은 여직 버리질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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