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신의 말,“소염다혜(少鹽多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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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전 중등교장 김봉주 선생의 투병 얘기. 꽃샘 속에 지역이 훈훈하다. 지난 2월 20일 종편 방송에 내외가 출연하면서 더욱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그는 염분 없는 음식만 먹는다.

1982년,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단백뇨가 나왔다. 서울 큰 병원에 가 재검한 결과 사구체신염, ‘만성콩팥병’이라는 것. “술?담배?커피를 멀리하고 과로하지 말고 스트레스를 피하고, 염분을 줄이고 체중을 일정하게 유지하라.” 의사의 소견에 눈앞이 캄캄했다. 고민 끝에 소금을 사용하지 않은 음식을 먹기로 결심한다. 무염 음식은 먹기에 거북하다. 맛을 못 느끼는데다 역겹다. 밥을 물에 말아 억지로 넘겼다. 앉았다 일어서려면 어지럼증이 일기 일쑤. 한데 3개월이 지나면서 현기증이 사라졌다. 음식이 입맛을 따라갔고, 6개월 만에 자신을 얻었다. 오기가 생긴 것이다. 한 발짝 더 나갔다. 건강과 관련된 신문?잡지 등 간행물에서 참고할 내용을 찾아 읽고 현미밥에 길들이면서, 양조식초?참기름?마늘로 간을 맞추는 무염식 식단 개발에 올인했다. 출근길 그의 손에는 늘 아내가 조리해 준 도시락이 들려 있었다.

간간이 신장병을 앓는 이들이 식이요법을 하지 못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마다 식이요법을 하면 살 수 있다는 신념이 굳어 갔다. 걷기운동을 병행해 매일 3㎞를 처음엔 천천히 뛰다시피 했다. 점차 건강을 되찾으면서 마음도 평정됐다.

음식을 가려 먹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특히 회식자리가 쉽지 않았다.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 이와 자리를 함께할 때는 불편했다. 갈등도 많았다. 하지만 살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믿음으로 참고 참았다. 자그마치 32년이다.

신장염을 앓는 이들이 수소문하면서 많이 찾아왔다. 설명해줬지만 실천한 이는 적었다. 그들 중에는 3, 4년 만에 유명을 달리한 사람도 있다.

투병 시작 5년차, ‘섬 중 섬’ 우도 근무를 해보라는 권유가 있어, 그곳 중학교로 임지를 옮겼다. 2년 동안 조용한 섬에서 생활한 게 건강에 도움이 됐다.

그가 말하는 식이요법의 핵심은 ‘소염다혜(少鹽多醯), 소금은 적게 식초는 많이’ 몸신의 말이다. 식초는 신맛으로 산성이지만, 먹고 나면 알칼리성이 돼 체질 개선을 크게 돕는다. 이제 그는 식초가 없으면 식사를 할 수 없다. 모든 반찬이 소금 없는 식초를 사용한 조리다. 그의 아내는 어느새 식초를 사용하는 무침조리의 달인이 됐다. 30여 년을, 그런 조리로 학교에 도시락을 싸고 다닌 그다. 한국교원대학교 구내식당에 특별 주문해 장기간 교장자격연수를 받았다. 외국여행은 엄두도 못 내다 고민 끝에 동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모험이었다. 아내의 치밀한 준비가 있어 가능했던 일이다. 반찬 가방 하나 더 들고 다니며 여정을 무난히 소화해 낸 것. 그 뒤로 해외여행을 몇 차례 더 했음에 자신도 놀란다고 말한다. 그는 의사도, 대학에서 관련 학과를 전공한 사람도 아니다. 전문적?체계적 지식을 갖고 있지도 못하다고 겸손해 한다.

산은 오르는 자의 것이다. 몸도 마찬가지라는 게 그의 경험칙이다. 애쓰면 몸도 느끼고 감응한다. 신장 투석도, 신장 이식의 효능도 20여 년 정도라는 게 의학의 정설이다. 그러나 그는 생을 고희 넘게 이어 온다. 그는 ‘몸신’이다.

“사람의 욕망 중에 식욕이 얼마나 큰데…. 참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참아 왔지요.” 그의 목소리엔 큰 울림이 있다.

지난해 12월, 고희연에 17명 가족이 자리를 함께했다. 참 벅찼다. 그는 교직 정년 후 줄곧 숲 해설사로 뛰고 있다. 이 나이에 이르도록 투석없이 살고 있는 게 꿈만 같다, 원이 없다 한다. 이제야, 아내에게 하고 싶던 말을 꺼내는 그. “여보, 당신 덕이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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