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아부오름-단숨에 오르면 든든한 아버지의 그림자와 마주한다
(9)아부오름-단숨에 오르면 든든한 아버지의 그림자와 마주한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 아부오름 분화구

매서운 추위가 몰아친 겨울이 가고 오름들이 저마다의 매력을 발산하며 탐방객들의 발길을 유혹하는 봄이 돌아왔다. 바야흐로 오름 탐방의 계절이 온 것이다.

 

이에 겨울 내내 잔뜩 웅크렸던 몸을 펴고 제주의 비경을 벗 삼아 오름 탐방을 하면서 봄의 정취를 만끽해 보는 것은 어떨까.

 

아부오름은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산164-1번지 ‘송당 마을 공동목장’ 안에 위치한 가운데 움푹 파인 오름의 모양이 마치 가정에서 어른이 듬직하게 않아있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부는 제주 방언으로 아버지처럼 존경하는 사람을 뜻한다.

 

또 송당마을과 당오름 앞에 있다 해서 ‘앞오름’으로도 불리고 있다.

 

아부오름은 입구에서부터 30여 m 전진하면 영화 연풍연가의 촬영 장소로도 유명한 팽나무와 벤치가 있다.

 

영화 속 연인에서 실제 부부의 연을 맺은 배우 장동건과 고소영의 애틋한 사랑을 표현한 곳이다.

 

이러한 아부오름은 높이가 51m에 불과, 정상까지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작은 오름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나지막한 뒷동산에 불과하지만, 속은 경탄을 자아내게 하는 절경을 품고 있다.

 

평균 지름이 160m에 바깥둘레가 1400m가 넘는 거대한 분화구가 오름 가장자리에 위치, 마치 이탈리아 로마의 콜로세움을 연상케 하고 있다.

 

무엇보다 분화구의 경계를 따라 원을 그리며 심어져 있는 삼나무는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것처럼 아부오름 만의 절경으로 자리 잡았다.

 

삼나무에서 눈을 떼고 오름 전체를 둘러보면 제법 넓게 펼쳐진 탐방로가 마련돼 있다.

 

정상부 1바퀴는 대략 1.5㎞로 정상의 능선을 따라 걷다 보면 20~30분이면 충분한 거리다.

 

하지만 탐방로를 걷다보면 삼나무 숲길을 비롯해 넓게 펼쳐진 초원도 감상할 수 있는 등 산책로로는 이만한 곳이 없다.

 

특히 오름 정상에서는 좌보미오름, 문석이오름, 거미오름, 높은오름, 다랑쉬오름, 돛오름, 당오름, 밧돌오름, 안돌오름, 거슨새미오름, 칡오름, 민오름, 비치미오름, 족은도림, 도리미오름 등이 눈에 잡힐 듯 다가온다.

 

아부오름의 정상에서 바라보는 이들 오름의 선은 그야말로 제주만이 연출 가능한 절경이다.

 

이와 함께 아부오름은 식물군락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오름 가운데 하나다.

 

과거에는 오름을 따라 잔디군락이 넓게 형성돼 있었으나, 해송·국수나무 등 목본식물로의 전이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또 찔레·청미래덩굴 등 가시나무의 점유 면적도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다.

 

▲ 아부오름 숲길

아울러 오름의 굼부리 안에는 홀아비꽃대, 우산나물, 좀비비추 등의 원식생이 보전돼 있으며, 피뿌리풀과 고비 등 다양한 식물들도 서식하고 있다.

 

한편 아부오름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영화 ‘이재수의 난’이다.

 

현재 아부오름 분화구의 경계를 따라 원을 그리며 자란 삼나무는 1999년 개봉한 영화인 ‘이재수의 난’을 촬영할 때 심었던 것이다.

 

이재수의 난은 1901년 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막강한 힘을 행사하던 천주교도의 행패에 맞서 이재수와 오대현이 이끈 민란으로, 700여 명이 숨진 사건이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엔 천주교인이 핍박 받는 존재가 아닌 프랑스인 신부의 힘을 업고 민초들을 억압했다는 사실.

 

여기에 세금 징수관의 횡포와 신목(神木), 신당(神堂)을 없애는 등 제주도민의 문화를 무시하는 행위까지 더해져 민초들의 삶은 고달파지기만 했다.

 

이에 대정군수 채구석과 유림(儒林) 오대현은 ‘상무사’라는 비밀결사를 조직, 관군과 교회에 대항한 데 이어 관노 이재수와 도민들도 일본인들로부터 입수한 무기로 무장해 민란을 일으켰다.

 

이재수는 민초들과 함께 천주교인과 관군을 공격해 제주성을 함락시키는 등 가톨릭교도 500여 명을 처형했다.

 

이후 정부에서 파견한 강화진위대에 의해 진압, 이재수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처럼 이재수의 난은 대한제국(1897~1910년) 당시 외세를 등에 업고 들어왔던 천주교의 폐단을 잘 보여준 사건이다.

 

천주교는 불과 50여 년 전인 1845년 조선시대 말기에는 서학이라는 이유로 탄압 받았으나, 1886년 조선이 프랑스와 한불수호조약을 맺고 1887년 조약이 비준되자 포교가 자유로워졌다.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자 그동안 억압되던 천주교는 프랑스라는 외세의 힘을 업고 교세가 확장된 것이다.

 

이처럼 이재수의 난은 1901년 당시 제주에서 실제로 일어난 천주교인과 도민들 간의 충돌 사건을 다룬 근현대사의 비극이라 할 수 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