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제주 민심 살피며 잔치를 열던 향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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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청 기능 수행...유교문화 한 단면 엿볼수 있어

 

향사당(鄕射堂)은 봄과 가을에 사람들이 모여 향사음례(鄕射飮禮), 즉 활쏘기와 함께 주연을 베풀던 곳이었다. 주연을 열면서 고을의 당면 과제를 논의하거나 민심의 동향을 살피기도 했다.

향사당은 지방의 자치기관인 향청(鄕廳)의 역할을 맡았고, 우두머리인 좌수(座首)와 좌별감·우별감 등 3인이 상시 근무하던 청사였다.

여기서 사(射)는 공자가 ‘확상의 들판에서 활을 쏘아 현인을 얻는다’고 말한 데서 유래됐다.

공자는 산동성 곡부현 궐리 서쪽에 있는 확상(?相)이란 곳에서 활쏘기를 할 때 제자 자로에게 활을 쏠 사람을 맞이하도록 했다.

단, 싸움에 진 장수와 나라를 망친 대부, 제 부모를 두고 남의 후계가 된 자는 들어오지 않도록 했다.

상벌을 분명히 해야 나라가 흥하는 근간이 된다는 의미로 향사당의 고귀함과 엄격함을 강조한 것이다.

 

 

향사당은 원래 고려 말과 조선 초 유력인사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자치기구인 유향소(留鄕所)에서 유래됐다.

벼슬에서 은퇴한 관료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향촌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세운 기구였다.

그러나 유향소의 유향품관(은퇴 정치인)들은 고을 수령을 능멸하거나 반대로 수령과 한 패가 되서 양민을 괴롭히는 일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태종과 세종 시기에 유향소는 폐지와 부활이 반복됐다.

제주 향사당은 당초 오현단 인근 가락천 서쪽에 있었으나 1691년 제주판관 김동이 찰미헌 인근으로 자리를 옮겨 세우면서 지금의 제주시 삼도2동주민센터 맞은편에 들어섰다.

1797년 유사모 제주목사는 향사당의 사(射)를 사(社)로 바꿔 새롭게 현판을 제액했다.

 

 

1835년 제주목사 박장복과 제주판관 김영이 새로 개축했고, 조선 후기에는 향청의 우두머리인 좌수의 거처로 사용됐다.

조선 초기 전국의 향사당은 관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설치됐으나 나중에는 관아 부근으로 옮겼다.

제주 향사당 역시 같은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수령을 견제하던 기능에서 점차 수령을 보좌하는 역할로 변해 향청의 기능이 격하됐다.

건물 모양은 일(一)자형으로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조선시대 유교 문화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유적으로 꼽히면서 1975년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됐다.

1980년 건물을 해체할 당시 천장에서 ‘崇禎紀元後四乙未二月二十四日上樑(숭정기원후4을미2월24일상량)’이란 묵서가 발견됐다.

이를 통해 제주 향사당은 1835년(헌종 1) 2월에 마지막으로 보수됐다.

1981년 향사당은 옛 모습으로 복원됐지만 오랜 세월 속에 부침을 거듭했다.

1909년 제주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신성여학교가 이곳에서 개교했으나 1916년 일제에 빼앗겨 히가시 혼간지(東本願寺)라는 일본 절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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