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대기업 최고 경영자의 꿈 대학서 꽃피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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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숭실대 총장 취임…창업 명문대로 육성
"건강 허락 범위서 이웃에 붕사하는 삶 살 것"
▲ 김대근 전 숭실대 총장은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배움의 길을 포기해야 했던 자신의 유년시절은 떠울리며 인도 농촌마을에 초등학교 준공사업을 전개했다.

김대근 전 숭실대 총장은 조용하면서도 차분한 개혁가로 평가받는다.


2009년 3월 숭실대 총장에 취임하자마자 그는 “변화와 혁신만이 살 길”이라며 ‘숭실 2020’이라는 미래상을 제시하고 ‘융합을 통한 창의적 21세기의 도전으로 학생이 만족하는 강한 대학’이라는 비전을 밝혔다.


김 전 총장은 총장 시절 “가장 발 빠르게 변화해야 하지만, 또 가장 변화하기 힘든 곳이 대학”이라며 “숭실대는 다른 대학이 가지 않은 길을 가면서 하나씩 열매를 맺고 결실을 이뤄 글로벌 일류 대학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그의 행보는 숭실대를 창업 명문대학으로 이끌었고, 학생들에게는 봉사활동을 강조했다.
봉사지원센터를 총장 직할 전담조직으로 설치하고 ‘7+1제도’를 만들어 8학기 중 1학기는 반드시 국내외서 봉사활동을 하도록 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유년시절, 기업경영자를 꿈꾸다=그는 1947년 8월 제주시 한림읍 월림리에서 1남 3녀 중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마을에는 전기도 없었고, 수도시설도 들어오지 않았고 대중교통도 없었다.


김 전 총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마을 웅덩이에 고인 물을 먹고 자랐다”고 회고했다.


그는 “1시간 이상 걸어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당시 생활이 너무 어려워 초등학교 취학 가능 학생 중 절반 정도만 학교에 다닐 수 있었으며 중학교, 고등학교는 극소수 학생만 다닐 수 있었다”며 “당시 농촌 마을의 아이들은 대학 진학의 꿈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의 이 같은 경험은 숭실대 총장 재직시절 기업으로부터 후원을 받아 인도 농촌마을에 초등학교를 건립하는 사업으로 이어졌다.


홀로 자취를 하면서 한림읍내에서 중학교를 다닌 그는 고등학교 진학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인문계고등학교로 진학할 것인지, 실업고등학교로 진학할 것인지를 두고 많은 고민을 하다 학비를 감면받을 수 있는 제주상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자취를 하면서 공부에 매진하다 극도로 몸이 쇠약해져 폐결핵으로 4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이 기간 그는 다가올 미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5개월이 지나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그는 2만원을 들고 무작정 상경했다.


김 전 총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서울에 가까운 친척도 없었고 대학에 다니는 친구 주소가 전부였다”며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무모한 도전이었다”고 말했다.


대학 진학을 준비하면서 가장 염려가 되는 것은 대학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가장 적은 돈으로 대학을 다닐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었다.


그는 “당시 숭실대학교는 기숙사가 완비돼 있었고 기숙사비가 하숙비의 절반이었다”며 “다행히 가까운 재일교포 인척의 도움으로 기숙사비와 일부 용돈을 충당했다”고 말했다.


숭실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할 때 꿈은 오직 기업경영자가 되는 것이었다.


김 전 총장은 “대학교수의 꿈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며 “대학교수직은 엄두도 못내고 쳐다볼 수 없는 다른 사람의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전문 기업경영자가 되기 위해서는 학부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하는 것보다 대학원에 진학해 더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 숭실대학교 베트남 대학 법인 설립 당시 감대근 전 숭실대 총장(사진 오른쪽에서 세번째)이 관계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교수의 길로 들어서 총장이 되다=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업한 그는 최고경영자를 향한 꿈을 가슴에 품고 업무에 매진했다.


입사 4년 차 어느 날 대학원 재학 때 지도교수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지방대학에서 교수추천의뢰를 받았는데 갈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그는 “당시에는 회사에서 인정을 받고 있었고 승진도 어느 정도 보장돼 있는 상황이어서 교수직에 관심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후 열흘 정도 고민을 하던 그는 ‘고향 제주에서 후학을 육성하는 일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서울 생활을 정리한 뒤 제주대학교에서 교수생활을 시작했다.


1980년 제주대학교 캠퍼스는 주간 수업은 아라캠퍼스, 야간수업은 구캠퍼스(현 제주대학교수속사범고등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당시 야간수업을 받는 학생들은 학업의 기회를 놓친 나이가 많은 직장인 학생들이었다.


학생들 중에는 고등학교 동기와 선배들도 있었다.


제주대학교 교수시절에 대해 그는 “제주는 내가 태어난 곳이고, 제주대학교는 교수생활의 출발점이었다”며 “이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축복인 동시에 은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제주대학교 교수 3년차에 모교인 숭실대학교의 부름을 받았다.


숭실대학교로 자리를 옮기면서 가장 우선순위는 학생 지도와 교육에 전념하는 것이었다.


그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지도한 학생들 얼굴과 이름을 거의 기억한다.


그는 “교수가 하는 일은 연구하고, 가르치고, 교내외에 봉사하는 것”이라며 “학교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피하려 하지 않고 문제 해결에 앞장서곤 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30년 동안 교수생활을 하면서 본인이 원해서 하기 보다는 학교의 어려운 상황을 외면할 수 없어 많은 보직을 맡았다.


회계학과장, 경영학부장, 생활관장, 학생처장, 경상대학장, 일반대학원장, 부총장직을 수행했다.


이후 2008년 그는 전체 교수 투표와 총장후보추천위워회 투표, 재단이사회 투표 등 3단계 모든 투표에서 1위로 득표해 총장에 취임했다.


총장 재직시절에 대해 그는 “대학 총장은 학자인 동시에 학교 경영을 책임지는 경영자라고 할 수 있다”며 “교수들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 권한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하며 학생들의 다양한 요구를 다각도로 검토해 해결방안을 제시, 이해 충돌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했다”고 말했다.


이어 “총장은 학교 안에서 구성원들 간의 이해조정을 해야 하고, 대외적으로 국제경쟁력 있는 대학으로 성장, 발전시킬 책무가 있기 때문에 구성원들 간의 협력을 이끌어내야 하고, 때로는 외로운 결단을 내려야 할 상황도 직면했다”고 회상했다.

▲ 베트남 탄호아캠퍼스 졸업식에 참가한 김대근 전 숭실대 총장(사진 윈쪽서 여섯 번째)과 학교 관계자들.

▲인생 2막 봉사의 길을 가고자 한다=김 전 총장은 65세를 정년으로 교수직과 함께 총작직도 퇴임했다.


지금은 명예교수로 일주일에 이틀 학부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강의의 상당 부분은 지금까지 경험한 많은 일화들을 예로 들면서 전공강의에 접목하고 있다.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그는 “내년까지 강의를 할 계획”이라며 “그 후 남은 인생은 건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가족에게도 봉사하고, 지금까지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이웃을 위한 보상의 일들을 찾아보려고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인생에 대해 강조하는 것이 있다.


김 전 총장은 “나는 학생들에게 30세까지는 미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가능한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잠재능력을 개발할 것을 강조한다”며 “그 후 60세까지는 본인이 좋아하는 일에 전념하면서 노후를 대비해 근면절약할 것을 권한다”고 말했다.


이어 “90세까지는 지금까지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이웃을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대영 기자     kimdy@je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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