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섬 소년, 세계적인 과학자 반열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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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전자공학도 꿈 이뤄…30개 벤처·특허 200건·최고 권위 '모얼락상' 수상
▲ 포스텍 총장을 역임한 김용민 교수가 몸담고 있는 융복합연구동(C5)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C5 연구동은 협력, 융합, 통섭, 창의, 센터 등 다섯 개 영어 단어의 머릿글자를 모아 명명했다.

김용민 전 포스텍 총장은 애플을 창시한 스티브 잡스처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인재를 양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유학생활 6년에 교수직 29년 등 35년간 미국에서 살아 온 그는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현 시대를 몸소 체험하고 연구해 온 과학자다.

그래서 항상 열린 사고와 상품화에 성공할 수 있는 깨어있는 지식을 추구하는 지식인으로 꼽힌다.

그는 총장 시절 포항지역 각계 지도층이 참여하는 ‘AP(Advance Pohang) 포럼’ 발족에 핵심 역할을 했다.

포항의 지도층을 이끌고 망했다가 재기를 통해 부활한 미국과 유럽의 도시를 방문, 미래의 성장 동력을 찾는데 주력했다.

그는 대학은 지역 발전의 주체로서 교육·연구는 물론 산업·사회·경제·문화 발전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자들이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도록 창업을 하려면 미국에 가라고 충고하고 있다.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제자들은 미국에서 벤처기업을 차리며 제2의 스티브 잡스를 꿈꾸고 있다.

▲섬 소년, 전자공학 박사를 꿈꾸다=제주시 삼도2동 원도심 출신인 그는 1953년 10남매(4남 6녀) 중 막둥이로 태어났다.

부친은 김기환 교수로 오현고와 서울대 약대를 나와 서울에서 제약회사를 경영하던 중 6·25전쟁이 발발한 이듬해인 1951년 1·4후퇴로 고향인 제주로 내려왔다.

그의 부친은 1976년까지 제주대 수의학과 교수를 역임했고, 1987년 별세했다.

김 전 총장은 제주북초등학교 4학년이던 1962년 아버지가 도서관에서 빌려 온 한 권의 책으로 인생의 목표를 갖게 됐다.

세계 최초의 핵잠수함인 노틸러스호를 소개한 책으로 사진 속 설계도를 보며 전자공학이 일궈낸 신기술에 빠져들었다.

“1960년대 전자공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지만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미국에 유학을 가서 전자공학 박사가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됐죠.”

부친은 교수였지만 10남매를 키우다보니 신구간 때마다 이사를 가야했다. 어머니 김양휘 여사에 대해 그는 “비록 이사를 다녀야 했지만 어머니는 배우는 것과 먹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오현중을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오현고 진학 대신 서울에 있는 명문고에 응시했으나 떨어졌다. 고교 입시 낙방은 어릴 적부터 간직해온 전자공학도의 꿈이 사라지는 줄 알고 큰 좌절을 겪었다.

2차 모집에 서울 대광고로 진학한 그는 더욱 분발해 1972년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명문고에 떨어지면서 겸손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죠. 노벨상을 받기 위해선 한 분야를 파고드는 연구가 필요하지만 사심(개인적 이기심)도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유명세를 타면 주위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하니 사심을 갖게 하고 결국 노벨상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1975년 서울대 졸업 후 이듬해 이화여대 출신 부인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결혼 2개월 만인 1976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이들 부부는 미국행 공짜 비행기를 타기 위해 입양아 10명을 미니애폴리스까지 데려다주는 역할을 맡았다.

“서울~일본~알래스카~시애틀을 거쳐 비행기를 5번 갈아 탄 후 미니애폴리스에 도착했죠. 양부모들이 눈물을 흘리며 한국에서 온 고아들을 반겨주는 모습에 마음이 찡했죠. 애들을 냉대하면 어쩌나하는 걱정은 사라졌지만 우리도 빨리 선진국이 됐으면 하는 마음을 다지게 됐습니다.”

▲ 1953년 4남 6녀 중 막내로 태어난 김용민 전 포스텍 총장(맨 앞) 가족사진. 오른쪽은 오현고 교감을 역임한 둘째 형 김용규, 가운데는 마취과 의사인 김용석, 맨 왼쪽은 막내 누나

▲미국에서 꿈을 이루다=미국 위스콘신대에서 6년간 공부하며 전자공학 석·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1982년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대 조교수로 임명됐다.

초등학생 4학년인 1962년에 간직한 꿈을 20년 만에 이뤄냈다. 1990년에는 워싱턴대 정교수가 됐다.

교수가 되기 위해 24시간 중 20시간을 연구에 매달리며 잠은 2시간만 자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 과제를 수행하다 자정에 다시 컴퓨터를 재부팅해 또 연구에 몰두하는 방식이죠. 젊은 시절 고생은 했지만 훗날에 많은 도움이 됐죠.”

전자공학과 교수인 그는 생명공학과 컴퓨터공학, 방사선의학과 교수를 겸임해 학제 간 융합 연구를 주도했다.

8년간 워싱턴대 생명공학과 학과장을 맡아 이 학과를 미국 대학 전체 학과 평가에서 톱5까지 끌어 올렸다.

2011년 국제전기전자공학회 산하 의학생명공학회(EMBS)가 산학협력에 기여한 학자에게 주는 최고 권위의 ‘모얼락상’을 받았고, 후에 EMBS 회장을 역임했다.

멀티미디어 영상 처리와 의료영상 분야에서 세계적인 반열에 오른 그는 연구 성과를 산업으로 연결하는 데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지금은 태아를 3차원 영상으로 바로 볼 수 있지만 원래 초음파기기는 심장 박동과 호흡, 몸무게 등 입력된 신호를 곧바로 영상으로 전환하질 못했다.

별도의 기계에 입력해 이틀 이상 변환 작업을 거쳐야 영상으로 재현됐다.

그는 별도의 장치를 거치지 않고 컴퓨터 소프트웨어로만 영상으로 바꿀 수 있는 기술을 제안을 했다.

그러면 가격은 낮추고 품질은 높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초음파기기용 소프트웨어가 없었던 시절, 학계는 실현 가능성이 없는 제안이라고 일축했다.

김 전 총장은 “1996년 독일 지멘스에서 내 제안대로 소프트웨어 방식의 초음파기기를 처음 내놓고 나서 일본 히타치가 내 연구에 지원을 시작했다”며 “2003년부터 히타치가 새로운 초음파기기를 잇따라 내놓으면서 상용화 바람이 불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연구 성과의 상업화를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의대·공대·법대·경영대 등 다양한 교수와 기업가, 벤처투자가를 만났다.

그 덕분에 생명공학과에서 30개의 벤처기업이 탄생했으며, 워싱턴대 전체 특허의 4분의 1인 200여 건의 특허가 나왔다. 기업체 기술 이전도 80여 건에 이른다.

마이크로스프트 창업주인 빌게이츠는 두 차례 만났다.

시애틀이 고향인 빌게이츠는 고향에 자선 재단을 설립했다.

김 전 총장은 생명공학과 학과장 시절 워싱턴대 기부금 사상 최고액인 700억원을 빌게이츠재단에서 받았다. 이 돈으로 대학 내 생명공학 빌딩을 세웠다.

“빌게이츠는 세계 최고 갑부였지만 만나보니 검소하고 겸손했죠. 빌게이츠는 애향심을 갖고 시애틀에 마이크로소프트 본사에 이어 자선 재단까지 설립하게 됐죠.”

미국에서 주가를 올리던 그에게 포스텍은 총장 자리를 제안했다. 미국에 정착한지 35년 만의 일이다.

▲ 1982년 미국 워싱턴대 전자공학과 조교수 시절 모습. 그는 1962년 전자공학도가 되겠다는 꿈을 20년 만에 성취했다.

▲세계 최고의 상아탑, 수장에 오르다=2011년 그는 제6대 포스텍 총장에 선임됐다. 1986년 개교 이래 비 포스텍 출신이 총장에 오른 건 그가 처음이었다.

2011년 9월부터 2015년 8월까지 만 4년 동안 포스텍을 이끌었다.

포스텍은 ‘개교 50년 미만, 세계 100대 대학 랭킹’에서 2년 연속 1위에 선정된 세계 최고 의 이공계 대학이다.

그는 총장으로 부임하자 ‘포스텍 총장 장학금’을 만들었다. 워싱턴대 재직 시 히타치가 지원한 40억원의 의료기기 연구비 중 남은 16억원으로 조성했다.

“귀국을 결정하고 나서 남은 연구비를 장학금으로 쓸 수 있게 설득했죠. 고맙게도 대학 측과 히타치는 저를 믿고 일면식도 없는 한국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데 동의했습니다.”

그는 16억원의 장학금으로 어렵고 복잡한 의료기기 연구를 수행하는 학생들에게 우선 제공했다.

총장 재직 시 그는 학생들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남이 가지 않았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라고 설파했다.

교수들에게는 가르치기 만하는 원 웨이(One Way) 교육이나 논문 작성보다 연구 결과를 상품화하는 아이디어를 내도록 주문했다.

김 전 총장이 현재 교수로 몸담고 있는 포스텍 창의IT융합공학과는 매년 20명의 신입생만 받고 있다.

포스텍의 한 해 전체 입학생은 320명에 불과하다. 소수 영재를 모아 고급 인재를 양성하고, 연구 결과를 산업에 전파해 사회와 인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 포스텍의 설립 목적이다.

▲ 1981년 미국 위스콘신대 유학 시절 부친인 김기환 제주대 교수와 모친인 김양휘씨가 방문했다. 김 교수는 당시 네 살 난 딸을 안고 있다.

▲제주, 고유의 발전 모델 필요=2012년부터 4차례 고향을 방문, 강연을 한 그는 “제주가 지속 성장하기 위해선 하와이나 발리, 홍콩, 싱가포르가 아닌 이들 도시를 리더 하는 고유의 발전 모델이 필요하다”고 제시했다.

김 전 총장은 “2013년 시애틀의 보잉사 본사를 방문했을 때 전 세계 항공 교통량 1위가 뉴욕~워싱턴D.C가 아닌 제주~김포 노선이라는 설명에 깜짝 놀랐다”며 “제주의 항공 유동인구가 전 세계 1위라면 이동인구로만 볼 것이 아니라 오래 체류하거나 상주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는 아이디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과 기업체, 관청은 사고의 틀을 깨고 벽을 허물어 서로 융합할 때 발전할 수 있다”며 “비전이 있고 원칙 있는 실천이 있으면 제주는 한 단계 도약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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