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흥 많은 섬 소년, 감성 음식 차리는 ‘문화 셰프’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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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후 소극장 열어 문화 공연…“제주, ‘문화 프리존’ 지향해야”
▲ 고학찬 예술의전당 사장.

고학찬 예술의전당 사장(69)은 인터뷰 내내 거침이 없었다.


특히 인간의 삶에 있어 문화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는데 “문화는 감성의 음식”이라며 “문화를 섭취하지 않으면 영혼이 박해진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문화는 시간 날 때 또는 공짜표가 생길 때 보는 것이 아니라 삼시세끼 밥 먹는 것과 똑같이 마음의 양식을 취한다는 자세로 일상적으로 접해야 한다”고 주문하기도 했다.


제주의 향토문화 발전에 대한 그의 생각은 간단명료했다.


“다른 지역에 없는 제주만의 신화를 축제로 승화시킨다면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제주를 문화 프리존(Free zone)으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섬 소년, 문화에 꿈을 싣다


고학찬 사장은 제주공항과 인접한 제주시 용담동에서 1남4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제주북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제주서교가 분교되는 바람에 학교를 옮기게 된다.


당시 제주서교는 학교 건물도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학교 건물이 지어지는 1,2학년 동안 학교 수업은 용두암 등을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는 제주일중에 음악특기생과 문화특기생으로 진학하게 된다.


제주일고 1학년 때 서울 대광고로 전학한 그는 당시에 제주 출신으로는 드물게 한양대 연극영화과로 진로를 선택했다.


그는 “예술의전당 사장이 된 것도 초등학교 2년 동안 바닷가에서 노래한 것이 도움이 됐다고 본다”며 “가난했던 시절, 어려웠던 시절이 소중한 자산”이라고 웃음을 지었다.

 

▲TBC PD로 사회 첫발


대학을 졸업하고 1970년 TBC PD로 사회에 첫발을 내딘 고 사장은 제주 출신이 느낄 수밖에 없었던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공채로 5명이 PD에 합격했는데 식사 시간 때 선배들이 밥 먹자고 동료들을 데려가면 혼자 남았다”며 “당시 TBC 방송국에 제주 출신은 고려진 아나운서 단 한 사람 밖에 없을 정도로 제주 출신들을 찾아보기 힘들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그러다보니 그는 남들이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가면, 힘없고 배경없는 사람은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만든 드라마 ‘손오공’이 전국 라디오 청취율 1위를 기록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당연히 주변의 인정도 부수적으로 따라왔다.


그 후로도 그가 손 댄 많은 작품들이 잇따라 히트를 했다.

 

▲ 1970년 한양대 연극영화과 졸업식 같은 과 노주현 (사진 오른쪽)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미국에서 사서 고생을 하다


그가 잘나가던 PD 생활을 접고 미국행을 결심한 것은 1980년 언론통폐합 때문이었다.


당시 TBC가 KBS로 흡수되자 자신감이 넘쳤던 그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미국행을 택했다.


“그 때는 방송 원고까지 검열을 받을 때여서 스스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새로운 삶에 도전하기 위해 미국으로 가게 됐다”고 그는 말을 이었다.


미국 LA(로스엔젤레스)에 정착한 그는 바텐더, 식당 매니저, 웨이터, 장갑 장사, 모자 장사 등 안 해 본 것이 없을 정도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미국 생활 몇 년이 지나 LA에서 거주지를 뉴욕을 옮긴 그는 대한민국 최초로 한국어 교포방송의 문을 열었다.


뉴욕 시장을 만나 한국어 방송을 하겠다고 요청, 승인을 받아 냈던 것이다.


TBC 아나운서 출신이었던 부인 안정희씨와 단 둘이 집에서 한국어 방송을 시작했다.


야채장사, 세탁소 등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교민들, 그리고 교포사회의 청소년들과 대화를 하고 정보도 교환했다.


그의 한국어 방송은 교포사회에 구심점이 됐고 점차 방송 시간이 늘어나면서 규모도 커지게 됐다.


1983년에는 뉴욕 KABS-TV의 편성제작 국장을 맡아 한국어 TV 방송까지 하게 된 것이다.


고 사장은 “생활 형편에 어려움도 많았지만 그 때가 가장 보람있는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귀국 후 예술의전당 사장으로 우뚝 서다


고 사장은 1994년 치매를 앓고 있던 어머니를 보기 위해 잠깐 한국에 들어왔다가 미국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고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케이블 TV시대가 열리기 시작할 때였는데 삼성에서 그에게 케이블TV를 맡아달라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그는 삼성그룹 산하 제일기획이 만든 Q채널의 제작국장을 거쳐 삼성 영상사업단 방송본부 국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러다가 방송을 그만두고 문화예술 분야로 눈을 돌린다, 서울 강남에 소극장인 ‘윤당아트홀’을 세우고 문화공연에 남은 생을 바치기로 한 것이다.


또한 박근혜 정부 출범 이전부터 뜻을 함께하는 인사들과 팀을 만들어 한국의 문화발전을 위한 공부도 하기 시작했다.


이게 인연이 돼서 예술의전당 사장으로 발탁된다.


“처음에는 낙하산이라고 비판도 있었지만 열심히 하다보니 사장을 연임하게 됐다”며 그는 예술의전당 사장 임명 배경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 1983년 뉴욕 한미 방송 시절 방송 준비 중인 고학천 사장(사진 오른쪽).

▲예술의전당 최초로 사장 연임


고 사장은 예술의전당이 문을 연 후 최초로 사장에 연임됐다.


2013년 3월 임기를 시작한 그는 지난 4월 연임되면서 2019년 3월까지 예술의전당 최고 책임자로서 한국 문화 발전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는 연임 배경으로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하는 연극, 발레, 오케스트라 등의 공연을 영상으로 찍어가지고 전국 각지에서 무료 상영하며 문화의 저변을 확대한 것이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은 것 같다”고 분석했다.


‘공연 영상화(Sac on Screen) 사업’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예술 분야인 서예의 중흥에도 앞장섰다.


정부로부터 100억원의 예산을 따내 서예박물관을 사실상 재건립했는데 올해만도 서예박물관 관람객이 이미 10만명이 넘어 섰을 정도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는 “20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서예를 우리 시대에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며 “앞으로 한중일 문화교류에 있어 서예가 가장 중요한 장르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가 예술의전당 사장으로 역점을 뒀던 또 하나는 기초예술의 발전이다.


“문화예술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초예술이 단단해야 한다”며 “예술의전당이 그 역할을 하기 위해 동요콘서트 등을 개최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문화예술인들의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예술의전당 예술대상’도 만들었다.


“연말에 방송국 등에서 많은 상을 주지만 모두가 연예 관련 시상식”이라며 “클래식에 대한 상이 없었기 때문에 예술의전당이 한 번 해보자하는 생각으로 이 상을 제정하게 됐다”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

 

▲문화융성의 올바른 길은


고 사장은 “서양의 문예부흥(르네상스)는 국가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며 “부를 축적한 귀족, 상인계급 등이 예술가들의 예술활동을 지원하다보니 문학, 미술, 건축 등이 발전을 할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어 “우리나라는 정부 주도형”이라고 지적하고 “민간이 스스로 일어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화예술 분야에 민간의 참여와 투자를 유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길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김영란법 때문에 오히려 민간 참여가 제한되고 있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김영란법 시행으로 농수축산물 이야기만 나오지, 아무도 문화는 말을 하지 않는다”며 “농수축산물은 10만원짜리를 5만원짜리로 만들 수 있지만 문화는 그렇지 못하다”며 문화에 대한 인식 전환을 요구했다.


그는 이어 “어떤 특수한 엘리트들을 위한 문화정책은 문화융성의 길이 아니”라며 “보다 많은 국민들이 균등하게 문화를 즐길 수 있어야만 문화가 융성할 수 있다”고 단언했다.

 

▲제주의 향토문화 발전과 미래에 대한 제언


고 사장은 “우리나라의 축제는 대부분 비슷하다”며 “제주는 제주만의 문화로 축제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몇 가지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우선 제주에만 있는 신구간 풍습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대한(大寒)지나서 5일과 입춘(立春) 3일 전인 일주일 동안은 제주 섬을 지키던 9000의 신이 모두 하늘로 올라가 제주 섬은 온전한 인간의 땅이라는 것이다.


이 때 인간의 축제를 열자고 제안한다.


“오름 하나를 정해 놓고 제주도 오케스타라가 양방언씨가 만든 ‘제주도환타지’를 연주하면서 밤에 오름 위로 9000신이 올라가는 것을 연출하고 일주일 동안 신들을 조롱하기도 하며 인간 축제를 열면 된다”고 그는 설명한다.


그 다음으로는 설문대할망 설화를 손꼽았다.


“전 세계에서 설문대할망만큼 큰 여신을 갖고 있는 지역은 제주 밖에 없다”며 “조그만 섬에서 그렇게 큰 여신을 상상해 낸 것은 대단한 것이고 세계적 자랑”이라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설문대할망 설화를 모태로 세계거녀대회를 여는 것도 좋은 축제가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 외에도 “제주의 탄생 신화인 고양부 삼성신화, 그리고 조선 정조 때의 조정철과 홍윤애(홍랑) 이야기 등 유배문화도 제주가 갖고 있는 아주 훌륭한 콘텐츠”라고 그는 덧붙였다.


“현재 제주는 문화인프라는 어느 정도 갖춰져 있다고 본다”며 “관광객들이 낮에는 관광을 하고 밤에는 문화공연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전 세계의 관광객들이 뉴욕에 가면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관람하듯이 제주에도 제주의 설화나 신화 등을 바탕으로 한 공연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주도가 문화예술 진흥을 위해서는 이런 분야에 투자를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제주의 미래와 관련해서 그는 “제주가 한중일의 가운데”라며 “제주는 국제자유도시인데 문화적으로 국제자유도시가 됐으면 한다”는 희망도 전했다.


문화와 관련해서는 아무런 제약이 없고 어떤 표현도 가능한 곳으로 만들었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제주의 문화 컨셉을 ‘프리’로 하고 문화에 대한 규제는 100% 풀어서 ‘문화 프리존’이 됐으면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의 인생 계획


고 사장은 “예술의전당 사장에 연임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사장 임기를 마무리하면 다시 소극장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그리고 여력이 있다면 제주의 향토문화를 토대로 페스티벌 등 문화 콘텐츠를 만들고 싶은 욕심도 갖고 있다.


또한 자신이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고향에서 후배들과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며 제주의 문화 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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