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빚·글빛
글빚·글빛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김길웅. 칼럼니스트

“글을 쓴다는 것,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신문의 논평이나 칼럼 등은 현안과 이슈에 대한 깊이와 통찰을 요한다. 정연한 논리와 대안 제시가 늘 고민이었다. 마감 시간에 쫓겨 전전긍긍하는 꿈에 시달리기도 했다. 일종의 직업병이다.

변변찮은 기사를 밖으로 내놓고 마음 졸였던 게 한두 번일까 싶다. 그래도 지인으로부터 그리고 생면부지 독자에게서 ‘잘 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산소 같은 위안을 얻었다. 그 한마디가 간난의 세월을 이어 준 동아줄이었다. 한편으론 그 말에 부담감이 엄습하기도 했다.”

지난 1월 퇴임한 제주新보 오택진 전 논설실장이 ‘춘하추동’에 올린 마지막 칼럼 ‘글빚’의 일부다. 읽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오 실장은 신문기자로 26년, 그중 8년을 사설과 칼럼을 쓰며 살아온 외곬 언론인이다. 긴 세월을 글에 매달려 퍽 신산(辛酸)했으리라 상상이 간다. 동병상련(同病相憐), 어간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오 실장과는 늘 지면에서 만났다. 나는 고정 필진 대엿 분의 글을 빠뜨리지 않고 정독하는 ‘춘하추동’의 애독자다. 아침 다섯 시, 대문간 오토바이 소리에 마당을 가로질러 신문을 들고 오면 머리글을 훑고는 곧바로 14, 5면으로 직진한다.

오 실장의 글은 어조 명쾌하고 이로(理路) 정연하다. 그뿐 아니다. 탄탄한 구성에 문장이 정도를 걸어 비문(非文)이 없다. 제한된 지면인데도 그만의 너른 터수를 확보할 수 있던 이유다. 인생·문화·자연·풍속에서 사회현실에 닿는 치밀한 관찰안이 독자의 공명을 이끌었다. 특히 전고(典故) 인용은 칼럼으로서 통섭에 크게 기여했다.

나는 그가, 독자에게서 들은 “잘 읽었다” 한마디가 ‘간난의 세월을 이어 준 동아줄’이었다는 말에 크게 공감한다. 글이 무엇인가. 어정뜨다 줍는 허드레 습득물이거나, 통속에서 잇속으로 얻어 낸 포획물이 아니잖은가. 딱딱 뼈 마주치는 산통(産痛) 뒤, 따낸 탐스러운 열매다. 글에 내공을 쌓느라 애면글면 부대껴 본 사람이면,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저벅저벅 걸어가다 부딪힌다. 눈앞이 문턱이다. 턱없이 높은 성채(城砦). 숨을 고르고 문을 밀어도 꿈쩍 않는다. 쾅쾅 문을 두드린다. 둔중한 철비(鐵扉)다. 거푸 두 번 세 번 두드리지만 주먹만 아프다. 종주먹 들이대려다 멋쩍어 관둔다. 더 나아가지 못하고 만다. 허무하다.

문득 앞으로 강이 흐르고 있다. 소리 없이 흐르는 강이다. 소리 내지 않으니 강이 더욱 깊다. 강물 따라 흐르다 깊이 가라앉았다 다시 뜨는 소급과 회귀의 회로를 돌아 나온다. 빛이 들고 있다. 빛이 오는 쪽으로 나아가리. 혼몽에서 깨어나 상상 너머로 저기 비산(飛散)하는 의식의 실마리를 붙들어야지.’

독백이다. 한나절, 턱 괴고 앉았는데도 글 한 줄은커녕 모두(冒頭) 첫 낱말조차 내리지 않을 땐 허탈하다. 글은 쓸수록 힘들다. 낯설다. 저기 산이 있어 오르되, 나는 늘 산(山) 밖에 있다.

추사는 “가슴속에 만 권의 책이 들어 있어 그게 흘러넘쳐 그림과 글씨가 된다.”고 했다. 그래야 비로소 서책의 기운·문자의 향기―서권기(書卷氣) 문자향(文字香)의 경지에 이르게 됨을 에둘러 한 말일 테다. 손끝이 아린 것만으론 안 된다. 가슴으로, 정신의 품격으로 그리고 써야 한다.

이제 다시는 ‘춘하추동’에서 오택진 실장을 만나지 못한다. 하지만 ‘지지(知止)’, 때가 되어 떠났으니 뒷모습이 사뭇 아름답다.

“당장 펜을 놓아 적막할 양이면 쓰시라. 당신의 ‘글빚’은 ‘글빛’이다. 삼라만상 인생 여적(餘滴)이 다 글감일진대, 다시 쓰시라.”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