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동행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고성의/수필가

모터보트가 서서히 속력을 낸다. 선미에 연결된 낙하산이 붕 떠오르는가 싶더니 아내와 나는 어느 사이에 바다 위를 나는 한 쌍의 인간 새가 되었다. 코타키나발루에서 인기 있는 해양레저의 하나인 패러세일링. 제주에서도 관광 온 젊은 커플들이 즐겨 찾지만 우리 나이쯤 되면 강 건너 불구경이었는데.


이번 여행은 뜻하지 않게 이루어졌다. 나의 생일에 맞춰 가족여행을 하자는 아들의 제안이 선뜻 내키지 않았다. 봄을 맞아 이것저것 일정이 잡혀 다음으로 미루자고 했지만 아들은 나의 좌우명인 ‘카르페 디엄(carpe diem)’을 상기시키며 모바일 항공권을 보내왔다.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 부모의 기념일에 전화로만 인사하는 것이 밀린 숙제처럼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다.


다섯 시간의 비행 끝에 닿은 곳, 보르네오 섬 북동쪽 말레이시아의 코타키나발루는 세계자연유산의 때 묻지 않는 자연 그대로, 현란한 반딧불이 투어와 숲 트레킹, 에메랄드빛 바다의 해양레저, 아름다운 석양 등 휴양과 관광으로 주목받는 천혜의 진주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캐리어를 끌고 출구 쪽으로 나오는데 싱가포르에서 먼저 온 아들네 가족이 마중 나와 손을 흔든다. 다섯 살배기 손자가 출구로 나오는 우리를 알아보고 “할머니!”하며 쪼르르 달려와 안긴다. 설 때 만났으니 한 달 여만의 재회, 그것도 해외에서 만나게 되니 더 반갑고 기쁘다. 가족이라는 정이 이렇게 살갑고 끈끈하다니.


사실 우리 가족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방학 때면 이곳저곳을 두루 찾아다니며 즐겼다. 가족들이 밥상머리에 모여 앉으면 여행담을 털어놓는 메뉴로 시끌벅적했다. 아이들이 출가하고 아내와 내가 직장의 올가미에서 벗어나자 지난 세월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해외여행에 눈길을 돌렸다. ‘인간은 언제나 떠나기를 갈구하는 속성을 타고났다’는 가브리엘 마르셀의 『여행하는 인간』을 찬미하면서 삶의 단조로움을 채워나갔다. 가깝게는 중국과 동남아의 여러 나라들, 멀게는 유럽과 미주지역의 색다른 풍물과 문화를 접하며 허기를 달랬다.

 

아프리카와 남미의 원거리 여행을 기웃거릴 즈음, 예기치도 못한 사이에 아버님이 먼 길을 서둘러 떠나가시고, 이어서 어머님이 뒤따라 떠나시는 바람에 맏딸인 아내는 심신이 극도로 쇠잔한 상태에서 덜컥 큰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그때서야 아내에게 무덤덤했던 내가 바짝 정신이 들었다. 아들 딸 낳아 키우고 출가시키며 살아오는 동안에 나로 인해 쌓인 스트레스도 오죽했을까. 이제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주부의 가사를 도와주는 일,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앞치마를 두르고 싱크대 앞에 서는 남자로 기꺼이 변신했다. 아내는 투병 의지가 강해서인지 해를 넘기면서 다행히 징후가 호전되어 중단했던 외부활동도 재개하며 예전의 일상으로 회귀 중이다.


부부로 산다는 것, 생각해 보면 존귀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지구상의 인구 70억이 넘는 가운데서 선택되어 일생을 동행한다는 것은 로또에 당첨되는 것보다 더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에서 시작된다.’는 오스트리아의 종교철학자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의 관계, 존재의 의미’가 의미심장하게 와 닿는다.


생각의 나래를 펼치며 하늘을 가르는 사이, 보트가 해안가에서 점점 멀어지고 시야가 넓어졌다. 투명한 바다, 해안가의 숲과 집들, 모래사장의 사람들, 멀리 섬과 섬들…. 시원한 바닷바람의 상쾌함으로 더 높이 날고 싶은 욕망이 고개를 든다. 더 높이, 더 높이…. 순간 그리스 신화의 이카로스의 날개가 떠올라 고개를 저었다. 추락하는 욕망의 굴레.


얼핏 아내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지상에서의 모든 집착을 떨쳐버린 듯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밑에 있는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든다. 행복해 보이는 표정, 순간 아내의 왼손을 오른손으로 살며시 잡았다. 여태 마음속으로만 맴돌던 한마디를 전하고 싶은 심정으로 손목에 힘을 주었다.
“참 고맙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