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암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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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옛날 제주도는 절해고도로 육지로부터 고립돼 있었다. 대신, 그런 환경 조건에서 독자적인 풍속과 문화를 형성해 왔다.

제주방언이라는 독특한 언어도 그런 환경이 낳은 고유한 문화의 하나다. 외부인들의 급격한 유입이 시작되기 전까지 단일한 언어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육지와 격절(隔絶)돼 외부에서 사람이 들어오기도 어려웠고, 섬에서 밖으로 나가기도 힘들어 자연 언어적 교섭이 이뤄질 기회가 없었다.

특히 아래아(ㆍ)는 방언학에서 독보적 존재로, 15세기국어 연구에서 제주방언이 갖는 대단히 소중한 가치다.

한데 문제가 있다. 제주도 사투리로 말하면, 다른 지역 사람들과 소통이 전혀 안 된다. 제주 사람들끼리만 소통이 가능하다. 더욱이 육지 사람들과 통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표준어를 익혀야 한다. 섬 밖에 나가려면 표준어를 말하는 게 상책이다. 그러니 제주사람들은 거의 완벽한 표준어 화자(話者)여야 한다. 방언과 표준어 둘 다 구사하는 이중 언어 사용자인 셈이다.

제주에 시집온 한 여류작가가 관찰자 입장에서 쓴 글이 흥밋거리다. 육지에서 잠시 제주에 내려오는 젊은 내외와 마중 나온 시어머니와의 상봉 장면이다.

‘80세쯤 돼 보이는 시모가 며느리 손을 덥석 잡으며, “아이고, 손지 곱들락허게난 데련 와져시냐? (아이고, 손자 곱게 낳아 데리고 왔냐?) 하며, 아들 내외를 바라보는 눈빛이 흐뭇하기만 하다. 바로 이어지는 말, “속암쪄, 게나저나 하영 속암쪄.” 알아들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나, 며느리는 아무 말 않고 배시시 웃기만 한다.

그 며느리, 시어머니의 말을 듣고 이혼까지 생각했었다는 후문이다. 그도 그럴 게, ‘속암쪄’란 말을 어찌 알아들을 수 있으랴. 필시 ‘속고 있다’로 들렸을 테다.

무릇 사람의 감정이란 자유분방한 것이어서, 사투리가 신경을 건드려 놓아 지역감정을 촉발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영호남 지역 간의 오래된 비호감이, 방언이 잘 엮이지 않는 데서 비롯한 것일 수도 있다. 간드러진 전라방언과 억센 경상방언이 충돌한다. 방언이 지닌 감정을 익살맞게 풍자하면, 그보다 유쾌한 웃음도 없을 것이다.

전라도 옹기점 주인이 물건을 팔고 있다. 경상도 사람이 묻는다. “이놈은 얼마고 저놈은 얼만교?” 주인이 노기(?)를 추스르며 대답한다. “이년은 5000원이고 저년은 1만원이지라.”

한국의 카사블랑카가 지방을 돌아다니며 여러 여인과 사랑을 나눴다. 서울 여자와 자고 나니 그 여인 하는 말, “즐거웠어요.” 경상도 여인이 홍안에 웃음을 머금더니 “이제 니는 내 끼라예.” 전라도 여인은 치마를 휘두르며 “앞장서시오.” 그녀의 뒷모습은 아마 당차고 신명이 넘쳤으리라. 남편 고향이 제주도 여인은 말한다. “속심합써.”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는 얘기다.

“나 말, 무신 말인지 알아지쿠과?” 육지 며느리가 제주에 갓 시집올 때, 무슨 말끝에 토박이 시누가 그 올케에게 한 말에, 그만 질려 버렸단다. 몇 해 지나니 통하는 걸, 그때는 외국어보다 더 알아듣기가 힘들었다는 것이다. 제주방언도 국어인데, 익히면 왜 안 되겠는가.

요즘 젊은이들이 표준어만 쓰려 하니 큰일이다. 그런다고 제주방언을 민속촌에 가둬 놓을 수도 없는 노릇. 유네스코가 제주방언을 가장 심각한 소멸위기의 언어로 지목한 지 오래다. ‘제주어 말하기대회’ 등 방언 보전육성에 공을 들이고 있지만 쉽지 않은 현실이다. 인위적 보전이 어려운 것이면, 꼼꼼히 채록해 기록으로 남길 일이다.

제주방언은 곧 제주문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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