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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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심

비가 온다.


며칠 전 곡우도 지났는데 또 비가 내린다. 아직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들이 있어서일까. 산과 들에는 새로 난 잎들이 연둣빛으로 장관을 이루는데. 숲속 나무 사이로 드는 햇살에 작은 꽃들도 저마다의 모습으로 피어나는데, 무엇을 기다리며 비는 내리고 있을까.


주변의 풍경들을 감싸 안고 내려앉은 아침 안개, 함께 내리는 봄비, 타성에 젖어 흐르던 일상을 잠시 멈추게 한다.


언제부턴가 4월이면 계절병처럼 한차례 몸살을 치른다. 초봄을 휩쓸며 불어대는 마파람의 위세에 어지럼증이 돋고, 북쪽에서 불어오는 황사가 뿌옇게 하늘을 가리면 마음까지 부석해져 몸이 아파진다. 더구나 올해는 극심한 미세먼지로 맑은 날 보기가 드물어 호흡기까지 위협받고 있다. 이래저래 계절 나기가 버거워진다. 사월에 부는 바람에 상처가 덧나서 더 슬픔이 깊어지는 연유는 무엇인가. 부지불식간에 드리워진 이 슬픔의 근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늘 무언가에 빚진 듯, 바람결에 언듯언듯 총부리 앞에서 떨었을 눈망울이 스치고,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갔던 이들의 아우성이 산야에 메아리치며 들리는 듯하다. 춥고 배고픔에 떨며 산속을 헤매고 다녔을 사투의 순간들이 중산간의 들판을 애달프게 한다.


4월이 다 가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꼭 가봐야 할 것 같은, 그 일에 며칠 전 마음을 내었다. 힘든 일도 아닌데 걸음이 쉽지 않아 번번이 미루다 길을 나섰다.


봄기운이 화창한 오름을 곁에 두고 있어도 여전히 회색 구름이 낮게 떠 있었다. 덥다고 느낀 날이었는데 순간 싸늘한 냉기에 몸을 떨었다. 저절로 손이 모이고 눈이 감기고 고개가 숙여지는, 가슴이 먹먹해 할 말을 잃고 마는, 웃는 것조차 죄가 될 것 같은 그 곳. 제주 4.3 평화공원이다. 몇 번 들른 적이 있지만 실내에 있는 전시관만 둘러보게 되어서 늘 아쉬웠었다. 야외에 조성된 공원에는 70년 전 제주의 아픔이 고스란히 세워져 있다. 바람도 이곳에선 숨을 쉴 수 없는지 사방이 고즈넉했다. 서너 마리의 까마귀들이 자신들만의 언어로 꾸르륵거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사뭇 마음이 긴장되었다.

 

위령탑과 위령비, 위패등 모두 사자를 위한 것들이어서 두려운 마음 애써 진정하며 차례차례 둘러보았다. 사망자 이름은 단 한 줄인데 그 한 줄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는 큰 비석들이 광장을 두르며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 망자의 수가 얼마나 많았음을 짐작게 했다. 광장 가운데쯤엔 제대로 장례를 치르지도 못한 희생자들을 위하여 저승길에 입고 갈 수의를 형상화한 조형물이 있었다. 두루마기와 장옷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고 어린아이 남녀, 성별 구분 없는 태아의 몫으로 다섯 점을 조각해서 ‘귀천’이라 명하여 넋을 위로하는 것이라 했다.

 

태어나지 않은 아기를 위한 저고리 수의는 보는 순간 숨을 멎게 했다. 1세라 적힌 위령비 앞에서는 면목이 없었다. 도대체 이 아이가 왜?. 무자비함이 인간의 잔인함, 비정함이 끝없이 저질러졌음에 몸서리가 일었다. 맨 안쪽에 넓게 조성된 묘역엔 검은 그림자 같은 행불인 위령비가 열을 지어 쭉 메워져 있고 거기에도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조각상 하나가 한가운데 처연하게 서 있다. 공원 한 바퀴를 다 보고나니 가혹한 역사의 소용돌이가 어떠했는지 명징하게 느껴졌다.

 

단 한 줄. 이름 석 자. 감히 바로 볼 수 없었다. 이들의 피울음이 서려 있는 이 땅에서 나는 너무 가볍게 사는 건 아닌지. 고개가 숙여졌다.


온 섬을 뒤흔들며 불었던 광풍에 삶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한 세대의 아픔을 위무하며 옷깃을 여몄다. 간절한 마음으로 빌었다. 만물을 나고 자라게 하는 그리고 다시 그 품으로 거둬들이는 태초의 생명의 근원인 땅에 이마를 대고 이 많은 원혼을 위해 진언을 했다. 이 땅에서 살아갈 후세들이 빚진 마음으로 살아가지 않게 슬픔이 대물림 되지 않게 설운 한 모두 풀고 따뜻한 영혼으로 극락왕생하시기를 간절히 빌었다. 돌아서 나오는 데 민들레꽃이 노랗게 피어있었다. 바닥을 짚고 단단하게 피어난 토종 민들레였다. 지난 몇 년은 외래종 민들레가 온 들판을 점령해서 안타까웠는데 반가웠다. 겨우내 추운 땅속에서 한 포기 민들레를 피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숨을 풀무질하며 버텨냈겠는가. 우리의 삶도 풀무질이다.


어느새 안개가 걷혔다. 또 다른 일상이 시작된다. 계절마다 곳곳마다 많은 일이 일어나고 스러지고 매일 매일의 삶은 이어진다. 가끔은 어찌할 수 없는 삶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속수무책일 때도 있지만 내리던 비가 개듯 지나간다. 아픔이든 기쁨이든 지나가는 데는 매한가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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