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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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윤/수필가

동지(冬至)가 지난 12월 하순, 올레 13길을 걸었다.

 

용수 포구를 출발하여 순례자의 교회, 닥모르오름을 돌아 저지 마을회관에 이르는 14.8킬로미터의 행로다. 중산간의 좁은 숲길과 밭길을 걸어 오름을 오른다. 헐린 밭담과 이끼 낀 돌길, 솔잎 길과 고사리숲길을 걸으며 귀와 눈, 마음을 열어 태고의 이야기를 듣는다.

 

출발한지 20여 분만에 닿은 곳은 순례자의 교회. 마늘밭, 양파밭에 둘러쌓인 들판에 우뚝 선 하얀색 목조건물이다. 종탑은 높이가 5미터쯤 되고 본당(?)은 네다섯 명이 들어갈 만한 크기다. 고개를 들어 종탑을 바라보니 “길 위에서 묻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걸어갈 길을 생각하라는 뜻일까. 현무암을 벽돌처럼 반듯하게 쌓은 ‘좁은 문’을 머리 숙여 들어간다. 겸손하지 않으면 영혼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묵시하는 듯. 세찬 겨울바람으로 닫혀 있는 문고리를 조심스레 당겼다. 매무새를 고치며 안으로 들어서니 외경심이 온 몸에 스며든다.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찬송 소리가 영혼을 덮는 듯 아침 햇살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하여 선비 책상 위에 펼쳐진 말씀에 내려앉는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태복음 7장 13~14절)

 

좁은 문은 무엇을 가리킬까, 묵상하며 발걸음이 닿은 곳은 용수저수지.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든 축구장 17배쯤 되는 크기다. 뭍에는 수생식물이, 물속에는 잉어, 붕어, 민물장어 등이 어울려 살고, 겨울에는 황새, 청둥오리, 쇠백로 등 철새들이 찾아든다. 저수지 둘레를 걷노라니 물위에서 노니는 철새들과 소복이 쏟아져 내리는 햇살에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이 어울려 한 폭의 그림 같다. 조물주가 자신이 지은 물고기와 새들을 보며 ‘참 좋았다’ 하신 장면이 이렇지 않았을까 싶다.

 

저수지 둑길을 지나 특전사숲길로 접어들었다. 제13공수특전여단 병사들이 만든 고목이 무성한 곶자왈 길이다. 울퉁불퉁한 돌길을 비틀거리며 걷다 함몰된 터에서 천냥금(학명, 자금우) 군락과 조우한 것이 아닌가. 눈발이 날리는 추위에도 청록색 잎에 빨간 보석을 내민 자금우. 열매를 달기까지 자연과 얼마나 많은 교감을 나누며 키워냈을까. 쭈그려 앉아 눈 맞춤을 하자 내 마음을 아는 듯 꽃말처럼 ‘변함없는 마음’으로 ‘내일의 행복’을 빌어주는 듯하다.

 

세찬 바람에 해바라기하며 도착한 곳은 ‘잃어버린 마을’ 조수리 하동. 40여 호에 2백여 주민들이 농사짓고 축산을 하며 살던 자연마을이다. 1948년 4월 3일,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하며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무장 시위대와 군경의 무력충돌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제주섬 온 땅은 유리창 깨지듯 산산조각이 났다. 중산간 마을에 내려진 소개령(疎開令)으로 주민들은 삶의 터를 떠나 해변마을로 이주해야 했다. 같은 해 12월 3일 주민들이 살던 집들이 소실되면서 마을공동체가 사라진 것이 아닌가. 헐린 올레와 집담, 우영밭(텃밭)의 대나무 등이 당시의 흔적을 말해주는 듯. 아침저녁으로 연기가 피어오르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안개처럼 퍼지던 마을, 이제는 새소리만 공기를 가르며 숲 속을 채운다. 누구를 위한 싸움이었는지를 생각하며 고목숲길로 들어섰다. 앙상한 나뭇가지 틈새로 조각난 햇볕이 어깨를 따뜻하게 감싼다.

 

‘쉼팡에서 쉬멍 놀멍 걸읍서.’(쉼터에서 쉬면서 천천히 걸으세요)

 

조수리 마을 청년들이 지은 원두막 쉼터에 붙여놓은 제주 방언이다. 그 안에는 가스버너와 초록색 주전자, 1회용 커피, 녹차, 종이컵, 푸른색 휴지통 등이 놓여 있다.

 

“커피 녹차 무료마씸.”

 

친근한 방언이 추운 몸을 녹여주며 ‘잃어버린 마을’의 후손들이 길손을 배려하는 마음을 느끼게 한다. 아내와 통나무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노라니,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한 것이….” 라며 솔바람이 스쳐 지난다.

 

하늘이 내렸다는 낙천(樂泉), 아홉굿 마을로 향한다.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밭길을 걷는다. 담쟁이가 밭담을 얽어매고, 송악줄기가 돌담을 휘감는다. 이끼가 그늘진 돌담을 덮고, 모람 덩굴이 산담(묘지의 담)을 겹겹이 에운다. 세월은 그저 흐르는 것이 아니리라. 휘감고 덮고 쌓이며 나이를 말해 준다. 걸음을 멈춰 송악줄기에 달려 있는 짙은 자주빛 열매를 만지노라니, 대나무 공기총에 열매를 총알삼아 놀던 초등학교 시절이 손에 잡힐 듯하다.

 

마지막 목적지를 향한다. 밤이면 풀벌레들이 노래하고 장수풍뎅이가 창문 앞을 기웃거리는 낙천, 천 개 의자가 길손을 기다리는 의자마을. 에덴동산을 향하는 마음으로 걷고 또 걷는다. 그런데 웬일일까. 지금쯤은 도착할 시간이 된 것 같은데….

 

해가 닥모르오름의 능선을 넘어서자 몸과 마음이 춥다. 오던 길을 U-턴하여 걸으며 길 위에서 인생의 길(道)을 성찰한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옳은 길인지, 이 순간 가는 길은 옳은 길인지, 내가 정말 올바르게 가고 있는지. 그리고 이 길의 종점은 어디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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