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조선시대 제주 학문의 요람 '귤림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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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넘게 유학기관으로 우뚝...서원철폐령에 허물어져
▲ 제주시 이도1동 오현단 내에 있는 귤림서원 전경. 2004년 제주시가 옛 자료 고증을 거쳐 복원했다
제주도기념물 제1호는 제주시 이도1동 오현단으로 이곳의 핵심 유적은 귤림서원(橘林書院)이다.
 
조선시대 학문의 요람인 귤림서원은 1578년(선조 11) 제주판관 조인후가 김정(1486~1521)을 기려 세운 충암묘가 효시이다.
 
김정은 조광조와 함께 사림파의 주도로 정치개혁을 펼치려다 1519년 기묘사화로 실패하자 제주로 유배를 왔다. 왕의 명령에 따라 사약을 받고 36세 나이에 자진했다.
 
1658년(효종 6) 제주목사 이괴는 경내에 장수당 학사를 지어 유생들이 사서삼경을 배우도록 했다.
 
1667년 제주판관 최진남은 사(祠·제사)와 재(齋·교학 기능)를 갖춘 명실상부한 서원으로 만들었다.
 
1682년 숙종은 예조정랑 안건지를 제주로 보내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지정하고 ‘귤림’이라는 현판을 하사했다.
 
사액서원은 왕으로부터 현판과 서적, 토지, 노비를 하사받아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이다.
 
귤림서원은 원래 김정을 모셨다가 1683년 정온·김상헌·송인수를 추가로 봉향해 4현을 섬겼다. 1695년에는 송시열을 배향하면서 5현을 모시며 유림들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했다.
 
조선 중기 대학자이자 노론의 거두인 송시열(1607~1689)은 장희빈이 낳은 아들(경종)의 왕세자 책봉은 시기상조라며 반대했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 83세 고령임에도 유배를 왔다.
 
▲ 오현단 내에 조성된 5현을 기리는 조두석. 위패를 모셨던 귤림서원이 허물어 지자 1892년 유생들이 비를 세웠다.
송시열은 1689년 6월 8일 유배지인 제주에서 한양으로 압송 도중 전북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다. 병환이 위중해 옷 입을 기력도 없었지만 사약을 내린 임금의 교지를 받들어 사약 세 보시기(그릇)을 마시며 마지막 순간까지 의연함을 보여줬다.
 
흥선대원군은 국가 재정의 낭비와 당쟁의 근원으로 보고 서원 철폐령을 내렸다. 200년 동안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던 귤림서원은 1871년(고종 8) 허물어지고 제사도 중단됐다.
 
1892년 김희정 등 제주 유생들은 5현의 위패를 모신 귤림서원이 헐리자 이 자리에 5개의 조두석(俎豆石·제단석)을 세우고 제를 올리면서 오늘날 오현단이 됐다.
 
제주인의 학문에 깊은 영향을 끼친 중요 문화유산이 오현단 터에는 1907년 도내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인 의신학교가 들어섰다.

이어 1909년 공립제주농림학교가 들어섰고, 1946년 오현중학교, 1951년 오현고등학교가 차례대로 개교했다가 교사를 이전했다.
 
제주시는 2004년 6억원을 들여 오현단 내 부지 877㎡에서 귤림서원을 복원했다. 유생들을 교육시켰던 강당인 장수당(77.8㎡)과 별사로 향현사(24㎡), 영혜사(24㎡)를 복원해 유학의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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