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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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건/수필가

지난 5월 말, 문학기행의 마지막 날에 강진에 도착하여 설렘을 안고 한민족의 대 스승인 다산 정약용을 만나게 됐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길은 험난한 길이었다. 길이 정리되지도 않았고 돌다리와 나무뿌리로 엉켜 있어서 걸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자기 집과 환경이 전혀 다른 유배지에 와서 외롭고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 그 어려운 생활을 어떻게 지냈을까. 다산의 위대한 정신을 마음에 새기면서 벽에 있는 초상화에 예를 갖추어 인사를 드렸다. 


다산초당을 찾기 전에 다산문학 전시관에 들렀다. 다산에 관한 기록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태어나서 돌아가실 때까지의 자세한 기록들이다. 아들들에게 보냈던 편지와 시들도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부인 홍씨가 보낸 치마폭에 두 아들에게 써서 보낸 편지가 있었는데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것은 일명 하피첩으로 알려졌다.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들은 자상하고 정성스러웠다. 읽어야 할 책을 선정해 주고 모자란 부분을 보충하라는 지시를 잊지 않고 있다. 공부하는 방법까지 제시해주고 있다. ‘정독하라, 메모하라, 그리고 초서(抄書)하라’는 공부 방법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초서는 책을 읽다가 중요한 구절이 나오면 이를 베껴 쓰는 것이다.


사의재(四宜齊)는 다산 초당에 오기 전에 살았던 집의 방 이름인데 네 가지를 꼭 지켜  자기 자신을 흐트러지지 않게 하려고 꾸민 방이다. ‘생각을 맑게 하고 용모를 엄숙히 하며, 언어를 과묵하게 하고 행동을 신중히 하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는 교훈적 말이다.


그리고 다산이 저술한 대표적인 저서로서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들 수 있다. 이 책은 다산이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저술한 책으로서 목민관의 치민(治民)의 도리를 기록한 책이다. 목민관은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지방자치단체장이나 각급 기관장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목민심서에 제시하는 리더십은 지위고하에 관계없이 모든 지도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다산이 세운 큰 업적으로 수원화성을 설계하고 건축한 것을 들 수 있다. 공학적인 아이디어나 기술을 발휘하여 예상보다 훨씬 짧은 기간에 성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다산은 삼십 대에 왕의 명을 받고 경기도의 암행어사가 되어 고통 받는 백성들을 위해 탐관오리들을 잡아낸다. 계속되는 가뭄으로 백성들의 고통이 큰 것은 알고 있었지만,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사람들의 삶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정조의 총애를 받고 벼슬살이에 승승장구하면서 잘 지내다가 40세 신유박해 때에 모함에 빠져 모진 고문을 받고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정약용은 7여 년 동안 주막이나 제자의 집 등에서 전전하며 지내다가 해남 윤씨 집안의 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가까운 백련사의 혜장 스님과도 많은 교류가 있었다.  이곳에서 다산은 비로소 안정을 찾고 후진 양성과 저술 활동에 매진하게 된다. 11여 년 동안 18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목민심서, 경세유포, 흠흠신서를 비롯한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이를 총정리한 ‘여유당 전서’는 철학, 법제, 종교, 악경, 의술, 측량, 건축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장래에 도움이 될 학문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초당 주변에는 커다란 바위 위에 다산이 직접 새겨놓은 ‘丁石’이란 글자가 있으며, 약천(藥泉)이라는 약수터, 앞뜰에는 차를 달였다는 다조가 있고 초당 왼쪽으로 자그마한 연못이 있다. 차를 즐기면서 세월을 보냈던 다산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다산은 꽃을 좋아하여 특히 작약, 국화, 모란꽃들을 좋아하였으며 지금도 주변에 이런 꽃들이 많이 자라고 있다. 주변 울타리나 마당에 꽃을 심는 이유에 대해 꽃들은 아름다움을 주고 향기를 주고 정신을 맑게 한다고 주장했다. 다산은 무릎을 방바닥에 붙이고 공부에만 몰두하다 보니 바닥에 닿는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다고 한다. 일생 고난 속에서 백성을 사랑하고 학문을 연구하면서 모든 길의 뿌리를 만드는 데 전념하였다. 


나는 다산의 이러한 훌륭한 정신을 좀 더 깊이 공부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인생의 하산길에 들어선 나에게 ‘다산이라는 불빛’이 초당 너머로 비쳐 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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