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 무섭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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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둘만 사는 집. 옆 사람이 ‘푸푸’ 밭은 숨 뱉으며 하는 말, “더위, 무섭네.” ‘아이고’를 연발하다 뒤로 이어진 말이다. 호랑이가 무섭다, 도둑이 무섭단 소리는 들었어도 더위가 무섭단 소리는 처음이다. 실없이 웃었다.

하늘이 잉걸불을 마구 쏟아 낸다. 오관을 닫고 앉아도 양은냄비에 안친 물처럼 대지가 펄펄 끓는다. 제주의 최고기온 38도는 기억에 없다. 이어지는 폭염경보 속에 숨이 가쁘다. 낮만 아니라 밤낮없이 덥다. 푹푹 찌는 여러 날의 열대야는 고통의 시간이다.

선풍기를 끼고 앉지만 조금 지나면 바람 날 끝이 닳아 무뎌진다. 한두 시간이 효용의 한도인지 자연 아닌 건 금세 바닥이 나버린다.

산이나 바다를 찾으면 좋으련만 먼저, 오가며 흘릴 땀과 치다꺼리를 생각한다. 결국 그냥저냥 집에서 뭉그적대는 게 상책이란 계산에 잇속이 실린다.

하릴없이 마당 그늘에 앉아 책장 넘기다 글 몇 줄 끼적인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소극적 내서(耐暑)를 선호하게 된 건 나이 탓이기도 하나 그것만도 아니다. 어디 나가 봐도 그렇지 하는 실리 쪽에 뜻이 가 있는 탓이다.

궁즉통(窮則通)이라는데, 이 여름은 그런 궁리도 용납지 않는다. 마당 그늘이 깊다 한들 산만할까. 풍덩 석간수 흐르는 물웅덩이에 몸을 담가 고단한 다리 호사시키는 것만 하랴 싶다. 둘은 진즉에 턱없이 먼 것이다.

이 ‘무서운’ 여름날, 책 펴고 앉아 있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내 깜냥엔 책장을 넘겨보지만 한 낟알 머릿속으로 굴러오지 않는다. 손 하나 까딱 않는데도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판인 걸. 옛날 땡볕 아래 조밭 매던 우리 어머니는 바람 한 점 없는 사래 긴 밭에 앉아 호오이 호오이 휘파람을 불곤 했다. 어느 결에 살랑거리며 이마로 오던 솔바람 소리.

긴긴 여름날 하오, 남쪽 울안 돌 탁자 멀꿀나무 작은 숲 아래 앉았다. 책 한 장 넘기다 손으로 흐르는 땀을 훔쳐내며 할딱거리는 중이다. 울 밖에 주택단지 신축이 한창이라 떼 지어 오던 매미 소리도 뜸한 여름. 더위에 날개 처졌는지 늘 오던 새도 오지 않는다. 여름 경(景)이 단조하니 더 더운가.

내게 더위를 견뎌 낼 재간이 있을 턱이 없다. 더위가 ‘무섭다’고 발설해 놓고 머쓱했던지 수박 화채 한 그릇 들고 오는 손, 이런 고마울 데가. 찜통더위에 천사가 따로 없다. 수박 맛이야 다소간 하고 얼음물을 내리니 오장이 다 서늘하다.

정말 덥다. 그렇다고 더위에 굴욕이라니. 아직은 체면 구기는 얘기다. 문득 도공을 소재로 한 내 글, 〈청자의 속살〉 한 대목을 떠올린다.

‘자기는 흙과 유약과 불의 삼중주다. 셋이 잘 만나야 한다. 고열의 불길 속에서 태어난 푸른 속살, 청자! 흙은 모성, 유약은 배냇저고리, 불은 태어나기 위해, 새 생명을 얻으려 한 생을 버리는 의식이다.…50여 일, 가마에 불을 지피고 초벌과 유약 바르기를 거쳐 익힌 도자기를 꺼내기까지. 마침내 청자 탄생의 순간, 도공의 눈이 빛난다. 다가가 고개 숙이고 등 구부린 무릎 꿇음. 그것은 오랜 시간, 불의 심판을 견뎌 낸 도자기에 대한 경외심의 발로다. 아아, 비색, 그와의 첫 대면의 환희여!’

이 더위에도 도공은 불가마를 떠나지 않는다. 애오라지 현묘(玄妙)한 비색을 위해 바쳐진. 청자는 불의 헌신이다. 이 더위에도 확확 끼얹는 뜨거운 불을 안고, 명품 탄생을 기다리고 있을 테다.

우리는 이 여름, 얼마나 투덜대는가. 잠시 불의 심판을 기다리는 도공을 떠올린다. 가마 속이 1000도. 그 앞에 요즘 폭염은 고열도 아닌, 군불에 불과하다.

그래도 덥다. 이것 참, 더위를 견디려 최면이라도 걸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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