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주량을 살피소서
부디 주량을 살피소서
  • 제주신보
  • 승인 2018.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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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건, 제주대 교수 교육학 전공/논설위원
나이 탓인지 숙취에서 깨어나면 몸이 힘들어 매번 술을 덜 마시겠노라고 다짐한다. 그러나 그것도 며칠이지 글을 오래 쓰다보면 의례 막걸리나 맥주를 찾게 된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갈증 때문이다. 막막한 삶의 갈증. 그러나 그런 갈증은 결코 무엇으로도 해소되지 못한다. 그것은 때로 그리움이기도 하고, 갈망이기도 하다. 이런 정체 모를 갈증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

추사 김정희도 제주유배생활 동안에 그런 갈증에 시달렸다. 그에게 갈증은 공포이기도 했고 외로움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도 술을 많이 마셨다. “휘날리는 백발은 삼천장이나 되고(飄零白髮三千丈), 홍진에 시달린 이 몸 육십년이 되었구나(折磨紅塵六十年), 나는 세상일 잊으려 자꾸 술만 마신다(我愛沈冥頻中聖)”고 했다. 추사의 고독과 슬픔이 잘 드러나고 있는 구절이다.

오래 산 기쁨보다 오래 쌓인 수심 때문에 덧없이 늙어 어느덧 백발이 삼천장이 되었다는 중국의 이백이 쓴 “흰 머리털이 삼천길(白髮三千丈), 수심으로 이토록 자랐네(緣愁似箇長)”라는 시 구절과 유사하다. 이백이나 추사나 삶의 갈증을 채우지 못한 채 술을 마셨던 사람들이다. 우리들 대부분도 그런 비슷한 처지에서 술을 마신다. 그러나 술에서 깨고 나면 세상일은 더 헝클어져 있는 법. 늘 그것이 문제이다.

시인 정호승은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 인생은 나를 위하여 단 한번도 /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기에 술로 갈증을 잠시 달랠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 또 한 잔의 술을 마신다. 달리 이유가 있겠는가. 바람 때문일 수도 있고 싫은 사람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이유 없이 마시는 것이 술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한잔, 내일도 한잔을 한다.

이런 와중에 필자는 우연찮게 제주도의 고위험 음주율이 전국에서 1위(2011), 3위(2012), 2위(2013)라는 자료를 보았다. 청소년 음주율도 상위였다. 필자 때문에 빚어진 결과는 아니지만 일조를 한 것만은 분명했다. 조선 정조때 김종수는 “우리 마을은 다른 풍속이 없고, 그저 술만 천성으로 좋아한다.(吾村無他俗 惟酒性所愛)”고 했는데 제주도가 마치 술만 천성으로 좋아하는 그런 동네가 아닌가 여겨질 정도였다.

개학을 앞두고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되었는데 음주강요나 선후배 간 가혹행위, 성폭력 등 인권침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현장점검을 벌이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옛 어른들은 소가 물을 마시듯 술을 마구 퍼마시는 것을 우음(牛飮)이라 했는데 이런 우음문화가 대부분 문제의 원인이다. 제주도의 고위험 음주율이나 청소년 음주율도 이런 우음문화와 무관치 않다. 술을 안 마실 수 없다면 소가 아닌 인간으로서 술을 마시는 태도를 배워야 할 판이다.

그렇다면 인간으로서 술을 마시는 태도란 어떤 것일까? 조선 정조때 권상신이 봄날 꽃그늘 아래서 술 마시는 방법을 쓴 글에 “술을 마실 때, 작은 잔을 나이순으로 돌린다. 술이 술잔에 들어 있으면 사양하지 않는 것이 예법이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이는 술잔을 받을 차례가 되었으면 술잔을 들어 꽃 아래 붓고 머리를 조아리고 꽃을 향하여 ‘삼가 꽃의 신이시여 주량을 살피소서. 주량이 정말 작으니, 이 때문에 술을 땅에 붓습니다’라고 사죄해야 한다”고 했다. 모름지기 술을 마실 때는 예법을 갖추라는 당부이다. 이렇게 자신은 물론 타인을 제대로 헤아릴 줄 아는 예법을 갖추는 일이야말로 바로 소가 아닌 인간으로서 술을 마시는 태도가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