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영원한 타자(他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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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쓰레기 분리수거장에 버려진 강아지를 발견했어요. 영하 10도가 넘는 혹한인데 담요에 덮여 낑낑대고 있지 뭡니까.” 서울의 한 아파트 경비원의 말이다. 또 혀를 찼다. “이사 가며 아파트 놀이터에 버리고 가기도 해요. 못 키울 거면 처음부터 거두질 말아야 하는 건데.”

동물, 그들은 ‘타자(他者)’다. 단지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반려동물도 한가지, 그렇다면 ‘반려’란 말이 무색해진다.

그들을 죽이고 살리는 게 모두 사람의 필요에 의한 것이다. 경제 개발과 경제 성장의 논리로, 또 한편으로는 보호와 보존의 이름으로. 두 가지가 충돌할 경우, 판단 기준은 장기적 관점에서 어느 게 더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느냐와 상대적으로 적은 기회비용을 소요하는가이다. 그게 그들의 운명을 좌우한다.

나는 극단적 동물애호가도 동물보호주의자도 아니다. 개를 키워 보고자 했으나 실패를 거듭했다. 그래도 식구로 만들어 본다고, 명색 진돗개를 새끼 때부터 애지중지 품었던 적이 있다. 목욕시키고 먹이를 주고 함께 산책하고. 한데 녀석이 상개가 다 된 어느 날, 울 밖 덤불숲에 가 오줌을 뉘는데 갑자기 내 손을 물었다. 변을 당한 것이다. 도무지 용서할 수 없었다. 옆집 과수원으로 보내고 말았다. 뒤가 쓸쓸했지만, 반려동물과는 인연이 아니라고 접어 버렸다.

대문 지붕 위에 올린 작은 숲에 깃들더니 고양이가 새끼 한 마리를 낳았다. 어미 없는 틈틈이 우는 소리가 하도 애절해 생선국에 밥 말아 마당 구석에 놓자 녀석이 슬금슬금 와 먹는다. 경계를 허물며 다가왔지만 치다꺼리하다 냉정히 돌아서기로 했다. 동네 고양이들이 어슬렁거리질 않는가. 한동안 칭얼대다 떠나갔다.

요즘 고양이가 창궐 수준이다. 길 가다 음식물 쓰레기통 옆을 얼쩡거리는 길고양이들을 볼 때마다 갈등을 느낀다. 그때마다 고양이 팔자 상팔자란 말을 떠올리며 눈을 돌린다. 저대로 살아가게 돼 있는 게 생명이다. 집으로 데려다 먹이고 입히고 재우지 않아도 되는 그들이다. 나와는 무관한 일로 치면 그만이다.

이런 것들은 내 삶을 구성하는 이율배반의 하나로, 양심과 이해가 상충하는 순간들이다. 그러나 차라리 사랑하지 않는 편이 훨씬 좋은 것인지도 모른다. 짐승은 짐승으로 차가운 대상의 세계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괜히 사랑하게 됨으로써 사람이나 동물, 피차간 마음에 고통을 안길 게 뭐냐는 생각이다.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이중 잣대가 필요하다.

반려동물을 기르는 인구가 1000만에 이른다고 한다. 덩달아 버려지는 동물도 늘어 10만을 넘어섰다 하고. 맡아 줄 사람 찾기가 마뜩찮은 긴 연휴에 동물 유기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딴은, 반려동물에 대한 이해 부족 상태에서 키워 보고 싶다는 즉흥적·일시적 욕구나 충동에 따라 쉬이 사들이는 것도 문제다. 쉽게 손에 넣으면 정도 쉬이 떼는가. 살아 있는 생명, 더욱이 ‘반려’를 산 채로 내버리다니. 죄의식이 없다면 심각한 일이다.

동물보호법이 개정돼 유기에 대한 과태료가 100만 원 이하에서 300만 원 이하로 오른다지만 근본적인 해법이 못된다. 생명을 존엄시하는 의식이 자리 잡아야 한다.

동물, 그들은 우리에게 영원한 타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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