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0년의 아픔을 견뎌 온 도민 모두가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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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권력 4·3의 진실에 침묵 강요
유족들 ‘연좌제’로 취업·승진 제한
김대중, 4·3특별법 제정에 기여
노무현, 국가원수로 첫 공식 사과
4·3유족회-경우회 2013년 화해
▲ 지난해 열린 69주년 4·3추념식에서 위패 봉안실을 찾은 한 유족이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남한 단독 선거를 둘러싼 좌우 갈등에서 4·3의 비극은 싹텄다.

해방 직후 이념충돌의 소용돌이에서 1948년 4월 3일 350여 명의 무장대가 도내 24개 경찰지서 중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다.

4·3사건 첫 날 경찰 4명, 무장대 2명, 민간인 8명 등 14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 국가공권력의 과잉 진압으로 3만 여명의 인명피해를 불러왔다. 동백꽃 수만 송이가 쓰러졌지만 아픔을 치유하고 서로를 용서하면서 제주4·3은 화해와 상생으로 승화했다.

 

▲연좌제의 대물림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컸던 참극이 제주4·3이다. 그러나 국가 권력은 수십 년간 제주도민에게 4·3에 대해 침묵을 강요했고, 진실을 왜곡·은폐했다.

무고한 희생은 당대에 그치지 않고 연좌제의 굴레를 씌워 유족들에게 대물림됐다.

군·경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사법처리됐다는 이유로 희생자 자녀들은 공무원 임용시험과 사관학교 입학시험에서 탈락했다. 신원 조회와 일상생활 감시, 해외 출국 제한 등 온갖 불이익을 당했다.

더구나 ‘빨갱이의 섬’으로 덧칠해 지면서 한동안 도민들에게 레드콤플렉스와 자괴감을 안겨줬다.

4·3특별법이 제정된 후 2002년 1715명이 4·3희생자로 처음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공무원과 군인·경찰,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승진과 출세에 영향이 미칠까봐 신고를 꺼려했다.

 

▲ 2000년 1월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4·3특별법에 서명하고 있다.

▲진상 규명의 시동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이 본격화된 것은 1990년대 말부터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한 후 1년 만인 1999년 12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2000년 1월 청와대에서 김 대통령은 4·3유족대표를 초청한 가운데 4·3특별법에 직접 서명했다.

2003년 10월 4·3진상보고서가 발간되자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를 찾아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 권력 잘못에 대해 유족과 도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며 사과를 했다.

노 대통령은 2006년 58주년 4·3위령제에 참석했다. 4·3위령제에 참석한 국가원수는 그가 처음이자 지금까지 유일하다. 당시 노 대통령은 4·3사건에 대해 거듭 공식 사과를 했다.

2013년에는 수십 년 동안 서로 등 돌리고 살아온 4·3유족회와 제주도재향경우회가 “우리는 모두 피해자다. 서로의 아픔을 함께 치유하겠다”며 손을 맞잡았다. 유족회는 현충일에 제주시 충혼묘지를, 경우회는 4·3위령제에 4·3평화공원을 방문해 참배하고 있다.

2014년 4·3위령제가 국가기념일로 지정돼 66주년 추념식은 처음으로 국가의례로 봉행됐다.

 

▲ 2006년 58주년 4·3위령제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이 희생자들을 위해 묵념을 하고 있다.

▲왜 화해와 상생인가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 봉기로 촉발된 제주4·3사건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7년 7개월 만에 종식됐다.

4·3사건은 제주도에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4·3진상보고서에 따르면 제주도 인구의 10%인 3만여 명이 희생됐다.

이 중 86%는 군·경 토벌대에 의해, 나머지 14%는 무장대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 중 33%는 어린이·노인·여성 등 사회적 약자였다.

중산간 마을의 95%는 불에 타 사라졌고, 9만 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진압작전에서 군인 180여 명, 경찰 140여 명 등 토벌대는 320여 명이 전사했다.

4·3사건 종식 후 토벌대 또는 무장대에 동조하거나 부역했던 이들은 한 마을에 살았지만 서로 고발하거나 복수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70주년을 맞은 4·3이 제주를 넘어 대한민국 전체, 더 나아가 세계 속에 평화와 인권을 일깨우는 소중한 상징으로 승화시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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