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와 허무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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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건, 제주대 교수 교육학 전공/논설위원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의 대표작이자 자유 예찬의 상징적 소설인 ‘그리스인 조르바’가 새롭게 출간되면서 50·60대의 큰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한다. 최근 발표한 세계문학 선호도 조사에 따르면, 50·60대가 꼽은 1위 작이 ‘그리스인 조르바’였다. 은퇴와 새 출발을 앞둔 50·60대가 조르바가 건네는 자유와 해방의 목소리에 크게 반응한다는 분석이다.

필자도 이런 자유와 해방의 목소리를 찾아 직접 그리스 크레타섬을 찾아가 보았다. 그리스는 생각보다 여행하기 힘든 곳이다. 더욱이 크레타는 땅거미가 내려앉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 느닷없이 울고 싶어지는 그런 곳이었다. 그곳에 크레타의 자존심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가 있었다.

그의 고향인 시골 마을 이라클리온의 미나젤로 호텔에 짐을 풀고 우선 찾은 곳이 카잔차키스의 묘였다. 가는 길에 엘레프테리아스 광장을 지나며 이라클리온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성곽 위에서 바다를 등지고 광장을 내려다보는 그의 전신 동상을 볼 수 있었다. 이라클리온에서 그의 기념관이 있는 미르티아 마을까지 버스는 하루에 한 대뿐이었다. 12시 15분. 그러나 1시가 넘어서야 나타난 버스 기사는 뚱한 표정으로 승객들을 맞았다.

그렇게 도착하여 만난 것이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는 묘비명이었다. 그것을 읽으며 나는 내내 우울하기만 했다. 전혀 자유스럽게 살지 못하는 나로서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고나서 그리스에서 돌아온 어느날 카잔자키스가 보낸 편지가 도착하지 않았는가. 놀라서 읽어보니 그는 내게 이렇게 당부하고 있었다.

“앞날이 걱정된다고 했소? 난 어제 일은 어제로 끝내오. 내일 일을 미리 생각하지도 않소. 나한테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뿐이오. 나는 늘 나에게 묻소. ‘자네 지금 뭐 하나?’, ‘자려고 하네’, ‘그럼 잘 자게’, ‘지금은 뭘 하는가?’, ‘일하고 있네’, ‘열심히 하게’, ‘지금은 뭘 하고 있나?’, ‘여자랑 키스하네’, ‘잘해보게. 키스할 동안 다른 건 모두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자네와 그 여자밖에 없는 걸세. 실컷 키스하게.’ 마지막으로 부탁하는데, 행여 나하고 똑같이 살아보겠다는 생각일랑은 말게. 당신이 할 일은 당신 자신이 되는 일, 당신답게 사는 일뿐이니. 그럼 건투를 비오. 크레타에서, 알렉시스 조르바.”

가슴 속에 상처만 가득할 때, 그 상처야말로 좀체 치유되기 힘든 성질일 때, 그래서 비록 그 상처에 무너졌더라도 끝내 자기를 일으켜 세우는 자존심을 잃지 말라는 당부였다. 그래서 아무것도 바라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고 그래서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고 나를 격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런 격려가 50·60대의 큰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50·60대야말로 열심히 살아온 세대지만 그러나 그들의 인생에도 권태와 허무라는 예정된 올무가 목을 조이기 마련이다. 이제 활기를 잃어버린 일상, 특히 은퇴의 시기에 대책 없는 권태와 허무는 당황스럽고 무겁기만 하다. 이렇게 일에서나, 길에서나, 마음의 혼란에서나, 모든 일에서 끝까지 왔다고 싶을 때, 그럴 때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강조하는 그런 자존심을 만날 수 있다면 그래서 나를 다시 찾을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기에 더 늦기 전에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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