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재(上梓) 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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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도서를 출간하는 일을 ‘상재(上梓)’라 한다. 재질이 좋아 글을 새기는 판목으로 가래나무를 쓴 데서 유래했다. 올릴 ‘上’, 가래나무 ‘梓’, 뜻 그대로 가래나무에 글을 올린다, 각자(刻字)한다 함이다. 지금도 원고를 인쇄로 넘길 때는 물론 책을 내는 것을 가리켜 상재한다고 말한다.

애초 상재는 힘들었을 테다. 판목에 글자를 새긴다는 게 쉽겠는가. 박아 나온 글자를 보며 놀라는 건 그 때문이다.

팔만대장경에 사용된 나무가 산벚나무와 돌배나무라는데, 그 나무를 목판으로 만드는 과정이 보통 힘들지 않았다. 나무들을 적어도 3년 이상 바닷물에 담갔다가 다시 소금물에 쪄 진액을 빼고 나서, 또 3년 이상을 그늘에서 말린 뒤 그걸 판목으로 다듬어 썼다.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경판 수가 8만을 넘는 데다 글씨가 힘이 넘치면서 고졸(古拙)하고 정교하다는 평이 이미 나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건 당연하다. 부처의 힘으로 외세의 침입을 막고자 했던 원력(願力)의 절정이었다. 무려 16년의 대역사 끝에 판각 사업의 완성을 보았으니, 우리를 숙연케 한다.

팔만대장경도 사용한 종만 다를 뿐 나무를 판목으로 다듬어 글을 올렸다. 상재한 것이다. 워낙 거대한 사업이라 개인이 책을 내는 일에 비할 건 아니나, 문인이 책을 내는 것도 상재다.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원로 시인은 160권이 넘는 저서를 출간해 놀라게 한다. 문학적 열정에 옷깃을 여미며 경의를 표하게 된다. 작품이 있어야 하는 일이니 열화 같은 창작열 앞에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다. 글을 쓰는 것은 외롭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일상에 치여 고단하단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주위에 문인들이 많다. 독자보다 시인 작가가 많다고 할 만큼 글 쓰는 이가 많다.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문인이면 어차피 작품을 쓰게 되고, 작품이 쌓이다 보면 으레 작품집을 내려 한다. 강렬한 욕구다. 바위에라도 이름을 새겨 두고 싶어 한다. 누가 얘기했듯 ‘글을 쓰는 것은 이름 석 자를 달아매기 위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득바득 자기 작품집을 상재하기에 이른다. 너도나도 다투어 작품집을 내면서 요즘 책이 봇물을 이룬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써 둔 작품을 골라가며 공 들여 낸 책들이다. 저자로서는 가래나무 판목에 글자 하나하나를 새기듯 애써 만든, 말 그대로 회심의 역작이다.

문제가 있다. 어렵사리 낸 책을 보내면 사람에 따라서는 상재의 지난함을 몰라준다. 심지어는 어느 구석에 냅다 버리기도 한다. ‘책을 드리니 잘 간직해 주십시오’라 해 ‘혜존(惠存)’이다. 친필로 써 보냈는데 그냥 팽개치면 이야말로 ‘춘사(椿事)’다. 뜻밖의 불상사란 의미다. 우리 문화가 이렇게 저급할 것을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싹 달라져야 하는 일이다.

3년 만에 작품집을 낸다고 지난 열흘 동안을 그 일에 몰두했다. 작품이 꽤 되다 보니 고르는 것에서 서문과 권말기를 쓰는 데 이르기까지 제대로 부대꼈다. 더욱이 전처럼 시집과 수필집을 동시 출판하려니 힘듦이 곱빼기다. 얼마 뒤, 연이 닿아 책을 보냈거든 제발 혜존이 춘사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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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서 2020-07-09 08:58:44
혜존은 받는 사람이 잘 간직하겠다는 의미인데
일제강점기에 반대로 주는 사람이 잘 보관해달라는 의미로 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