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돌 안된 아기도 숨죽였다…삶터는 핏빛 절규로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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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토벌대 선흘 마을 습격…주민 대부분이 목시물굴로 은신
죽음 모면해도 공포감 휩싸여
시신 불태우는 군인들의 만행
신원 확인 어렵도록 만들어

제주 4·3사건이 한창이던 1948년부터 다음 해 3월까지 제주지역 중산간 마을은 토벌대에 의해 초토화됐고 주민들은 살기 위해 인근 곶자왈과 동굴로 숨어들었다.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목시물굴은 선흘리 주민들이 은신처로 삼았던 곳이다.

토벌대 피해 곶자왈과 동굴로

선흘리는 19481121일 선흘초등학교에 주둔한 군인들에 의해 온 마을이 불타며 소개됐다.

중산간 마을 소개 작전이 시작되자 일부 선흘리 주민들은 가축과 가을걷이한 곡식을 두고 갈 수 없어 비상식량을 짊어지고 인근 곶자왈과 동굴을 피신처로 삼아 숨어들었다

목시물굴은 도툴굴보다 작은 굴이지만 200여 명의 이상 대부분의 선흘리 주민들이 은신했던 천연동굴이다.

목시물굴은 길이 100m 가량의 동굴로 입구는 두 개이다. 한쪽 입구는 한 사람이 누워서 들어갈 정도로 좁지만 다른편 입구는 비교적 크다.

입구를 들어가면 좁아졌다가 다시 넓어져 큰 공간을 만드는 전형적인 용암동굴이다.

동굴 내부에는 넓은 공간도 있지만 용암이 흐르다 굳어버린 암석이 바닥을 형성해 울퉁불퉁하고 낮다.

핏빛으로 변한 선흘곶

19481125일 목시물굴에서 1남짓 동쪽에 이웃에 있던 도툴굴이 발각되면서 많은 주민들이 현장에서 총살당했다.

이들 중 일부는 함덕 대대본부로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고문에 못 이겨 한두 사람이 마을주민들이 숨어 있는 목시물굴의 존재를 발설했다.

19481126일 함덕 주둔 9연대 토벌대는 길잡이를 앞세우고 선흘곶을 향했다.

다른 지방에 온 군인들은 중산간 지리에 익숙하지 않아 주민들을 길잡이로 끌어들여 토벌에 앞장세웠다.

선흘곶이 가까워지자 토벌대는 먼저 박격포를 쏘았다.

토벌대가 들이닥치자 주민 대부분 목시물굴로 피신했고 일부는 인근 숲속으로 무작정 달려갔다.

토벌대는 굴속에 수류탄을 투척하며, 주민들에게 나올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동굴 밖으로 나가면 토벌대에 의해 목숨을 잃을 것을 알고 있는 주민들은 버텼다.

돌도 안 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토벌대가 들을까 두려워 아이의 아버지가 입을 막아 아이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몇 시간 동안의 대치가 이어지다 아이들이라도 살려야 된다는 의견이 모아지면서 하나 둘씩 동굴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동굴 밖으로 나온 주민들은 군인들에게 포위됐다.

이 중 20대 이상의 남자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은 차량이 드나들 수 있는 반못굴 인근에서 차에 태우고 함덕으로 끌고 갔다.

따로 세워놓은 남자들은 굴 남쪽 50m 지점에서 한꺼번에 학살됐다.

군인들은 전날 고문을 받고 목시물굴을 안내한 사람도 현장에서 처형했다.

죽음을 모면한 이들도 공포에 떨어야 했다.

군인들은 40여 명의 죽은 시신에 이불이나 담요 등을 덮고 그 위에 기름을 뿌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하는 만행도 저질렀다.

마을주민들은 목시물굴에서 희생된 이들의 시신이 부패돼도 신원을 확인할 수 있도록 일부 시체에 나무패만 만들어 이름을 써 붙이기도 했다.

 

이어지는 비극

목시물굴에서 벌어진 학살 이후에도 군인들의 토벌과 살인은 계속됐다.

목시물굴 학살 이튿날인 19481126일 선흘리 2구 선인동에 숨어있던 밴벵디굴을 포위해 주민들 학살했다.

목시물굴에서 살아남은 여성과 아이들은 함덕 2연대 3대대본부로 끌려와 수용됐다. 이들 일부는 함덕과 선흘 사이의 억수동(북촌리)에서 학살됐다.

여성 26명은 19481226일 함덕리와 북촌리 사이에 있는 서우봉 북쪽 몬주기알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이처럼 며칠만 숨어 있으면 사태가 끝날 것으로 생각했지만 43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족을 잃고 생활터전마저 잃어야 했다.

4·3 당시 선흘리 주민 21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부광수씨(78)는 선흘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다.

그는 목시물굴 학살 당시 상황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그의 아버지 부서남씨와 외삼촌은 동굴에 은신해 있다가 26살의 나이에 토벌대에게 총살당했다.

부씨는 밤이 되면 토벌대를 피해 어머니와 형제들과 함께 들판과 산에 몸을 숨겼다아버지는 마을청년들과 함께 동굴에 피신했는데 그때 학살되셨다고 말했다.

당시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아남은 도리를 해야 한다면서 서로 교대로 망을 보면서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부씨는 토벌대의 눈이 무서워 낮에는 나서지 못하고 밤에 호롱불을 의지한 채 어르신들이 자식의 시신을 찾아다녔다토벌대들이 시신을 불에 태워 훼손돼 누군지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옷가지나 체격으로 시체를 찾아 임시로 시신들을 수습했다. 사태가 진정된 2년 후에야 정식으로 아버지의 무덤을 만들 수 있었다고 밝혔다.

또 부씨의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가 목숨을 잃는 등 4·3 당시 많은 가족이 희생됐다.

당시 목숨을 부지하고 끼니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마을이 전부 불에 타는 등 주민 모두가 가난해 이웃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부씨는 집과 밭이 불타 생계가 막막해 해안으로 거주지를 옮겼다먹을 것이 너무 귀해 살기 위해 해초를 캐다 먹기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부씨는 억울하게 돌아가신 영령을 위로하고 4·3의 참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목시물굴에서 일어난 일이 재조명돼야 한다그것이 진정한 상생과 화해를 이뤄낼 수 있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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