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뼈를 대충 추슬려 무덤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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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폭탄고에서 예비검속자 집단학살터로

섯알오름 학살터는 일본군이 1944년 말부터 알뜨르지역을 군사요새화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일본군 폭탄고터로 한국전쟁 발발 직후 예비검속자를 집단학살하는데 이용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계엄당국은 전국적으로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사람들을 체포했는데 이때 제주지구 계엄당국에서도 820명의 주민들을 검속했다.

당시 모슬포경찰서 관내 한림, 한경, 대정, 안덕 등지에서도 374명이 검속됐는데 이들 중 132명을 계엄사령부가 대정읍 상모리 절간 고구마창고에 수감했다가 송악산 섯알오름의 일제시대 폭탄고터에서 1950년 8월 20일(음력 7월7일) 집단학살했다.

이날 한림지서에 검속됐던 63명도 전날 저녁 대정지역으로 옮겨져 새벽 2시께 먼저 학살당했으며, 132명은 두시간 쯤 지난 새벽 4~5시께 학살됐다고 한다.

▲백조일손 유족들의 묘지 조성

희생자 195명 중 한림지역 63명의 시신은 유족들에 의해 3년 만인 1953년 밤중에 몰래 수습돼 현재 한림읍 갯거리 오름 만벵디 공동장지에 묻혔다.

모슬포지역 희생자 132명의 유족들은 시신 수습을 당국에 계속 요청했으나 묵살당해 오다 군부대 확장공사 당시 유해들이 들어나면서 1957년 4월, 사건 발생 6년 8개월만에야 시신 수습 허가를 받고 사계리 공동묘지에 부지를 마련해 시신들을 안장했다. 그러나 시신 수습 당시에는 이미 오랜 시간이 경과돼 희생자의 신원을 구분할 수가 없어 대강의 뼈를 추슬러 무덤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유족들은 ‘조상은 1백 서른 둘이돼 자손은 하나니 자손 한사람 한라삼이 백할아버지를 다 내 할아버지 모시듯 모시라’는 의미의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 명명했다.

백조일손 유족들은 묘지를 조성하면서 전면에는 ‘백조일손지지’, 후면에는 132명의 희생자 이름을 새긴 돌로 비석을 세웠다.

그러나 5·16 직후인 1961년 6월15일, 군사정권은 유족들을 위협해 묘비를 철거하게 했다. 또 유족들이 모이는 것조차 방해하고, 일부 유족들을 협박해 2~3개월 동안에 23기의 묘를 이장케 했다.

다행히 2005년 제주도로부터 제주4·3중요 유적지로 선정된 섯알오름 학살터는 2006년부터 학살터 정비사업이 추진됐다. 국비로 학살터를 매입, 추모비 및 제단이 건립됐고, 추모정시설과 학살터 재현, 진입로와 주차장 시설 등이 마련됐다.

이후 2008년부터 백조일손 유족회와 만벵디 유족회가 공동으로 매년 음력 7월 7일 ‘예비검속섯알오름희생자영령 합동위령제’를 봉행해오고 있다.

“누가 형님인지 알 수 있나...아무 유골이나 챙겨 묘역에 묻었다”

올해로 여든을 맞이한 양신하씨(80)는 6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섯알오름에서 벌어진 예비검속자 집단학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가 음력으로 6월 보름날이었는데 형님이랑 나는 집줄을 매어둔 후 조카들 데리고 바다에 갔는데 형수님이 ‘동네 사람들 향사에 모이는데 가서 얼굴 비쳐 버립서’ 해서 형님이 향사로 간거다. 그런데 향사에 간 사람들이 전부 무릉지서로 갔다고 하니까 우리 형님은 그냥 돌아왔으면 될 것을 너무 고지식해서 무릉지서까지 건 것이다. 결국 형님은 모슬포 절간창고에 구금이 됐다가 1950년 8월 20일 섯알오름에서 학살됐다.”

당시 섯알오름에서 195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무자비한 학살로 목숨을 잃었다.

유족들은 총살 현장으로 들어가 유해를 수습하려고 했지만 군·경 당국의 출입통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 6년 후인 1956년 3월 말 섯알오름 탄약고터가 군부대 확장공사로 붕괴돼 유해가 드러나자 유족들은 마침내 유해를 수습할 수 있었다.

“형님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하고 그 한을 가슴 속으로 삭히고 있었다. 그러다 1956년 5월 18일 고등학교 수업을 받고 있을 때 선생님으로부터 유골이 수습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현장에 달려갔더니 백수십명의 유족들이 물구덩이 속에서 시신들을 수습하고 있었다. 확실하게 자기 가족의 유골임을 알 수 있는 사람들은 유골을 찾아 갔지만 6년간이나 물속에 잠겨있던 유골들이었기에 어느 것이 형님의 유골인지 어떻게 알겠느냐. 결국 형수님에게 아무 유골이나 챙기라고 해서 두개골 하나와 수개의 유골을 받고 백조일손 묘역에 묻고 나왔다.”

이와 관련 양씨는 “아직도 4·3과 예비검속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며 “이와 같은 일들은 절대 잊혀져서는 안 되며 잘못 알려져서도 안 된다. 우리 후손들에게 정확한 역사를 알리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백조일손 알리기에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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