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한 번 잡히면 죽은 목숨”…통곡의 소리가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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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물 때만 본섬과 이어지는 길목
서청 특별중대 성산초 주둔으로
주민 학살터로 변모…고문 일삼아
세화·종달 등 타동네 사람도 희생
서귀포시 성산읍 터진목 학살터 전경. 1940년대 초까지 광치기 해변과 성산리는 물때에 따라 육지길이 열리고 닫혀서 터진목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서귀포시 성산읍 터진목 학살터 전경. 1940년대 초까지 광치기 해변과 성산리는 물때에 따라 육지길이 열리고 닫혀서 터진목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서귀포시 성산읍 성산리는 제주 본섬에 딸린 작은 섬이었다. 고립된 것은 아니고 썰물 때 드러나는 모래톱이 본섬을 이어줬다. 터진 길목(터진목)’을 따라 사람들이 왕래했다.

이런 지리적 여건으로 성산리는 19484·3사건 발발 초기에 무장대가 한차례 경찰 지서를 습격했지만 인명피해는 없었다. 이후로도 무장대로부터 이렇다 할 기습은 없었다.

성산일출봉을 끼면서 최고의 절경을 자랑하던 성산리는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특별중대가 주둔하면서 죽음과 통곡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서북청년단은 광북 이후 북에서 월남한 사람들이 만든 평남·함북·함남·황해청년회 등 이북 출신 청년단체가 통합해 1946년 서울에서 결성된 대표적인 반공우익 집단이다.

서청 제주지부(단장 김재능)1947년 조직됐다. 이들에 의해 자행된 무자비한 테러행위는 제주도민의 감정을 자극해 4·3 발발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서청 특별중대가 1년여 간 주둔했던 성산초등학교의 당시 모습.
서청 특별중대가 1년여 간 주둔했던 성산초등학교의 당시 모습.

서청 특별중대는 성산초등학교를 접수해 1년간 주둔했다. 주민들은 이북 말을 쓰는 50여 명의 군인들이 주둔했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군은 민간인 신분이던 서청단원로 구성된 특별중대를 만들어 토벌작전에 투입했다.

이들은 군복만 입었을 뿐 명찰과 계급장도 없었다. 군번이 없었고 군적에도 이름이 등재되지 않은 군인 아닌 군인이었다.

학교 건물에서 숙식하던 이들은 학교 옆 감자 창고에 주민들을 붙잡아 온 후 취조를 했다. 매일 같이 고문에 못 이겨 질러대는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툭하면 잡혀가 곤욕을 치렀고, 그곳에 한번 잡혀가면 살아 돌아오기가 어려웠다. 주민들은 무조건 잡아놓고서 두들겨 패는 게 일이고. 죽어나가는 사람도 많았다고 진술했다.

그래서 서청 특별중대의 존재는 성산면·구좌면 주민들에겐 악몽이었다. 이들은 주민들을 혹독하게 고문하다 대부분 총살했는데 그 장소가 성산리의 터진목우뭇개동산이었다. 주민들은 날마다 고문 받는 비명소리에 이어 총살당해 널려 있는 시체를 봐야 했다.

온평리, 난산리, 수산리, 고성리 등 4·3 당시 희생된 성산면 관내 주민 대부분이 이곳 터진목에서 희생됐다.

이외에도 구좌면 세화, 하도, 종달리 등에서도 붙잡혀 온 주민들이 이곳에서 희생된 경우가 많았다. 터진목뿐만 아니라 성산일출봉 북쪽의 우뭇개 언덕과 옛 성산초등학교에서도 많은 주민들이 희생됐다. 이곳에서만 토벌대에 의해 집단 처형된 양민은 467명에 달하고 있다.

 

성산읍 4·3희생자유족회는 2010년 터진목 초입에 희생자 위령비와 함께 467위의 이름을 마을별로 새겨놓았다.

위령비에 새겨진 추모글은 다음과 같다.

이유도 모른 채 끌려와 저들이 쏘아대는 총탄을 몸으로 막아내며 늙은 어머니를 구해내던 어느 이웃집 아들의 죽음도, 젖먹이 자식만은 품에 꼭꼭 껴안고 처절히 숨져가던 어느 젊은 어미의 한 맺힌 죽음도, 아버지가 아들을 아들이 아버지를,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피 토하듯 부르다가 눈을 감던 모습도 코흘리개 어린 우리는 기어이 그 모든 것을 보고 말았습니다. 서럽도록 보았습니다. 그리고 미치도록 울었습니다.’

 

정순호 4·3유족회 성산읍지회장
정순호 4·3유족회 성산읍지회장

가족 모두가 터진목서 학살평생 빨갱이 낙인 따라다녔다

4·3유족회 성산읍지회장을 맡고 있는 정순호씨(73·사진)4·3 당시 가족 전체가 터진목에서 학살당한 피해 유족이다.

낮에는 경찰이, 밤에는 무장대가 번갈아가며 마을을 들쑤시니까 젊은 사람들이 마을에 남아있으면 죽는다고 소문이 돌아서 아버지가 잠시 몸을 피했다. 그러자 특별중대는 아버지가 집을 비운 것은 무장대에 합류한 것이라며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까지 모두 데리고 가 터진목에서 총살했다. 당시 어머니가 나를 집에 두고 가면서 화를 피했지만 엄마 손을 잡고 함께 터진목으로 갔던 아이들도 많이 죽었다.”

당시 3살에 불과했던 정씨는 하루 만에 가족들을 모두 잃은 천애고아가 돼 친척집을 전전해야 했다.

그렇게 힘겨운 유년기를 거쳐 성년이 된 정씨는 공무원이 됐지만 4·3희생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찍힌 빨갱이라는 낙인은 평생 정씨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정씨는 그 당시만 하더라도 4·3희생자 유족이라고 하면 빨갱이로 몰렸다공무원이 되기는 했지만 빨갱이라는 낙인 때문에 승진이나 여러 가지 부분에서 많은 불이익을 겪어야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평생을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살아왔으며, 무슨 일이 터진다면 지역에서 가장 먼저 조사를 받는 것도 나였다당시 공무의 일환으로 일본을 방문할 일이 있었는데 귀국하자마자 경찰로 불려가 누구를 만났는지 등을 조사받아야 했다고 당시의 억울했던 심경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지금에야 4·3이 전국적으로 많이 알려지고 진실규명도 이뤄졌지만 아직도 빨갱이라는 억울한 낙인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하루라도 빨리 4·3에 대한 진상규명과 함께 희생자와 유족들에 대한 명예회복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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