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벚꽃이 막 피어날 그 때다. 긴 겨울 맨몸으로 추위를 막아내던 나무들이 시린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새 봄날 꽃망울을 내밀고 있었다. 자연이 시간을 거스르지 않고 빗장을 열자 꽃들은 길벗을 만나느라 야단법석이다. 조용하던 벚꽃 동네가 화답하는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때마침 부활주간이었다. 어느 신부님이 교도소 미사 중에 ‘발 씻김 예식(세족례洗足禮)’을 하고 계셨다. 열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을 본받아 ‘자신을 낮추고 서로 섬기라’는 뜻으로 가톨릭교회에서 부활시기에 행하는 예식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로마에 있는 소년원을 찾아 무슬림 청년들의 발을 씻어 주고 그 발에 입맞춤을 하셨다는 뉴스를 보았으나 바로 앞에서 재소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신부님을 보고 있자니 지근거리라 그런지 강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가톨릭 신자들부터 ‘세족례’를 끝낸 후 “신자가 아닌 분도 나오세요!”라는 멘트가 나갔다. 그러자 그때까지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던 재소자들이 하나둘 일어서더니 길게 줄지어 서는 게 아닌가. 차례를 기다리며 한발 한발 내딛는 표정들이 하나같이 자못 어둡고 무겁다. 어떤 심정들이었을까. 아마도 조금이나마 죄를 씻고 싶은 마음이, 어쩌면 그 마음이 내딛는 발걸음보다 더 앞서가고 있었을지 모른다. 수녀님도 따라가며 젖은 발을 닦아주느라 바빴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죄…, 죄란 대체 무엇일까. 우리 누구나 죄인이 아니랄 수 없을 터, 그 경계가 뿌옇게 흐려진다.
내 마음 안에 깊숙이 가라앉아 있는 그 무엇이 있다. 아예 무시해 버리자며 잊고 있다가도 우연히 마주치면 심연 위로 떠오르는 그것, 도시 사라지질 않는다. 작정하여 돌을 던져놓고도 태연스레 사는 모습을 보면 화가 치밀기도 한다. 흔히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어물쩍 넘기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기도 한다. 단지 하나다.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듣고 싶은 것.
부활 주간을 꽤 바쁘게 보냈다. 가톨릭교회 신자들은 부활 주간 마지막 삼일을 성聖삼일이라 하여 매우 경건하게 보낸다. 주님 만찬 미사와 세족례, 주님 수난 예식, 그리고 토요일 밤 부활초에 불이 당겨지면서 “예수 부활하셨네!” 노랫소리가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간다. 거룩하고 성스러운 부활축제였다.
나흘째, 부활 낮 미사가 끝나 돌아오니 동네는 온통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벚꽃축제 마지막 날이었다. 활짝 핀 꽃들은 찾아온 이들과 눈 맞춤 하느라 바쁘고 한시적으로 지정한 ‘차 없는 거리’엔 활보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노란 중앙선에 서서 인증 사진을 찍는 젊은이들, 솜사탕이 빠진 줄도 모르고 막대기만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 장애인 아들이 탄 휠체어를 밀며 느긋이 산책하는 엄마…. 경계가 사라진 그곳은 흡사 구속에서 해방된 듯 환호 소리로 넘쳐났다.
무언가 불쑥 마음의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게 있었다. 나 또한 그렇지 않은가. 돌아갈 수도 있는 곡선의 길을 고집스레 외면하며 자신을 가두고 있지 않았을까. 불현듯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 계명이 떠올랐다.
내 마음에 살랑 바람이 일었다. 깊숙이 머물고 있는 그 무엇, 이제 내보낼 때가 된 걸까. 그래. 마음의 소리를 듣자. 어차피 우리 누구나 씨줄날줄로 엮이면서 살아가는 삶이 아니던가. 더 머뭇거리지 말고 마음 청소를 하자. 덧칠해진 때를 씻어내고 내 본성의 심연을 향하여 마음의 지도를 따라가자. 별것 아닐 터이니.
양말을 신으며 콧노래라도 부를 듯 환히 웃던 젊은 재소자가 떠오른다. 신부님 사랑이 결 고운 에너지로 전해온다.
하늘이 맑다. 새 봄이 수줍게 열리더니 어느새 사위가 온통 녹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