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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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미 수필가

태양이 이글이글 끓어 비등점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연신 땀을 닦아 내어도 수건을 흠뻑 적시는 시간, 몸을 가눌 수 없게 한다.

L 호텔로 피서를 하러 간다. 먼 곳에서 떠나온 투숙객처럼 한쪽에 놓여있는 소파에 앉아서 여름 나기를 한다. 아무도 방해하거나 알아보지도 못하니 체면이 손상될 일도 없이 자유롭다.

우아하게 커피숍에서 음료 한 잔 마시는 것도 아끼면서 여흥을 즐길 수도 있다. 마침 한쪽에서는 피아노 3중주의 연주가 비바체의 선율로 흐르고 있어 땀에 전 온몸이 말끔히 씻겨진다. 얼마나 탁월한 선택인가. 이런 천국이 또 있을까.

눈요기하러 면세 코너로 간다. 꼭 살 것만 같은 분위기로 명품들을 훑어본다. 로또복권이라도 하나 당첨되면 사야지, 허황한 생각도 하면서 즐긴다.

수많은 고객을 상대하는 점원은 아무리 살 거 같은 분위기로 위장을 해도 꿰뚫어 보는 혜안이 생겼나 보다. 사지도 않으면서 이것저것 물어보는 내가 얼마나 귀찮았을까. 명품 가방에 시선이 꽂혀있는 나를 뚫어지라 쳐다보더니 메모지를 넘긴다.

어느 면세점을 가든지 이걸 달라고 하세요.” 하면서 그 모델의 넘버가 적힌 쪽지를 건넨다. 더 말을 시키지 말아 달라는 제스처다. 나는 그 메모지를 지갑 안쪽 깊숙이 꾹 집어넣는다.

명품이 눈에 밟혀 몇 바퀴를 돌다가, 쇼윈도에 도도하게 광을 발하는 그 가방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다시 눈도장을 단단히 찍었다. 아무리 털어내려 해도 그 명품 가방이 어른거리며 똬리를 틀고 있다.

혹자는 명품을 자자손손 쓸 수 있는 명작이라고 예찬하고 또 누구는 부르주아들이나 소장하는 화려한 간판에 불과하다고 강하게 혹평하기도 한다.

내가 명품을 살 능력이 되는가. 저 명품이 내 손에 들어오기엔 요원한 길이건만,

내 삶이 어느 부분 허기가 있나 보다. 명품을 들고 시대의 아류에 편승하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나를 칭칭 감고 있다.

드디어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끝내 내 욕망을 조절하지 못하고 뇌리에 걸려있는 그 명품 가방이 떠올라 서둘러 면세점으로 간다.

지갑 깊숙이 모셔놓은 넘버가 적힌 쪽지를 직원에게 살포시 건네고 기다리는데, 알 수 없는 용어를 말하면서 내게 묻는다.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다.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짐작건대 그 가방에도 여러 부류가 있는지, 어떠한 것을 원하는지를 묻는 거 같다. 주춤거리는데 눈치 빠른 직원이 얼른 가방을 들고나온다. 더는 나에게 아무런 답을 원하지 않은 직원이 고맙다.

얼마나 무안한지 주눅이 들어, 앞에 놓인 가방을 보면서 품위 있게 위선을 해 보지만 이미 들켜버린 내 수준을 무마하느라 안절부절못한다.

달랑 점원에게서 받은 넘버가 적힌 쪽지만을 믿고 사전지식이 전혀 없이 명품을 사겠다고 달려들었으니, 아무리 신분 상승을 하려고 위장을 해 보지만 내 품격은 어설프다.

명품 가방마다 이름이 있고, 재질이 여러 종류이고, 시중에는 비슷한 듯 다른 가짜 명품들이 판을 치는데 덥석 그 비싼 명품을 사 보려고 달려든 무지몽매함이라니.

명품을 든다고 내가 명품이 되겠는가. 저급한 내 영혼이 부끄러워 저 가방을 거저 준다 해도 사양해야만 되는 것을.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음에 오겠다고 무마하고 얼른 돌아선다. 반듯하게 걷던 내 걸음걸이가 뒤뚱거려 빠져나오는데 천릿길인 듯하다.

경기도 이천 도예촌을 간 적이 있다. 도자기 명장들이 빚어 놓은 백자의 자태에 눈이 혹한다. 빛깔의 순결함과 황금률의 곡선이 신의 선물이다. 언어도단이런가. 할 말을 잃어 한참을 눈으로만 느끼고 침묵한다.

한쪽 가마터를 조심스레 음미하는데 그 옆에 사금파리 무더기가 불쑥 눈에 들어온다.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걸작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면서 한 점 한 점 꺼내 들고 예리한 판단력으로 망치를 쳐 내렸을 순간, 그 파열음이 들리는 듯 온몸이 오싹해진다.

산산이 부서진 졸작들 앞에 나도 조각이 된다. 저 무더기만큼이나 부서져야 할까. 얼마나 더 기다려야 될까.

백자 한 점 나무상자에 비단으로 두르고 고이고이 모시고 집으로 가져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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