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치 있는 삶
운치 있는 삶
  • 제주일보
  • 승인 2018.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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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건, 제주대 교수 교육학 전공/논설위원

저의 개인 작업실이 있는 어음리에 가고 올 때면 하가리의 연화못을 찾곤 합니다. 연화못은 요즘처럼 연꽃 필 때가 가장 좋습니다. 연화못에 가면 바로 곁의 더럭분교를 만나게 됩니다. 더럭분교는 지난 3월 1일 자로 본교로 승격되어 이제는 더럭초등학교가 되었습니다. 2009년만 하더라도 전교생이 17명이었지만 2012년 삼성전자 지원으로 학교 벽이 무지개 색으로 칠해지고 명소가 되면서 그 덕분에 주변 인구가 꾸준히 늘어 이제는 전교생이 100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더럭초등학교로 승격될 만큼 아이들이 증가한 이유가 삼성전자 도움도 컸지만 무엇보다 연화못 덕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서유구(徐有)가 “연꽃 만 그루를 심어 놓으면 사람의 영혼이 향긋해지고 살갗이 파랗게 된다”고 했는데 그동안 하가리 연화못이 잘 정비되고, 매년 고운 연꽃들이 피면서 현지 주민들은 물론 방문객들의 영혼까지도 향긋하게 변했기 때문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입니다.

연꽃은 불교의 상징임에도 불구하고 선비들도 귀하게 여겼지만 그 방식이 좀 달랐습니다. 중국 위나라 정각(鄭慤)이라는 사람은 여름이면 친구들과 연꽃을 찾았는데 큰 연잎을 벼루 통 위에 올려놓고 술을 담은 다음, 비녀로 잎을 찔러서 연밥의 구멍과 통하게 한 다음 줄기를 코끼리 코처럼 구부려서 거기에 입을 대고 술을 빨아 마셨습니다. 그 술잔을 벽송배(碧松杯)라 하고 이렇게 마시는 술을 벽통주(碧酒), 이런 풍류를 벽통음(碧飮)이라 하였는데 조선 선비들에게도 전해져 유행했었습니다.

벽통음에 대해 서거정(徐居正)은 “오뉴월 높다란 못에 비가 새로 흠뻑 내리니 뒤집어진 연잎은 방석보다도 더 큼지막하네. 꺾어다가 통 만들고 통으로 술잔을 만드니 담아놓은 술이 눈에 가득 포도처럼 파랗다네. 머리 들고 하늘 우러러 두 손으로 떠받고서 코끼리 코를 구부려 마시니 향기가 촉촉하네. 한 번 마시니 눈서리를 더운 창자에 부은 듯, 두 번 마시니 양쪽 옆구리에 날개가 돋을 듯, 세 번 마시니 어느덧 취향(醉鄕)에 이르렀으니 해와 달도 아스라하고 천지도 좁게 보이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벽통음은 조선후기에도 크게 유행했었습니다. 이인상(李麟祥)은 연꽃이 유명하여 한양 사람들이 자주 와서 놀던 경기도의 서지(西池)라는 연못에서 벗들과 꽃과 시와 술과 그림이 어우러진 풍류를 즐기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연잎 위에 올려놓은 연꽃 안에다 유리로 된 투명한 술잔을 놓고 그 속에 촛불을 밝혀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는데 사치스럽다고 여길 만큼 고급스럽게 벽통음을 즐겼던 것입니다.

이처럼 여름이면 연꽃 등을 구경하면서 술을 마시고, 시회(詩會)를 즐기는 것이 조선 선비들의 운치 중에 하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생활이 바빠서 그런지 이런 삶의 운치를 누리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운치라는 것이 별거겠습니까? 마침 친구와 지난 주말에 하가리 연화못에 들렸더니 곱게 핀 연꽃 무리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영혼이 맑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벽통음은 아니지만 핑계에 친구와 막걸리 잔을 주고받았는데 이런 것이 운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연꽃이 지기 전에 친구와 얼른 연화못에 들렸다가 맑은 술 한잔하며 여름의 끝을 보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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