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학교서 이뤄진 무차별 학살…시신 수습도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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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토벌대 습격 시작
방화로 마을 초토화·학살
시신 방치, 구분도 어려워
‘개탄물’지역에 집단 매장
현재의 묘역으로 이장되기 전 옛 묘역에 세워졌던 현의합장묘 비석.
현의합장묘에 묻혀 있는 희생자들의 이름과 발생 내역들이 새겨져 있는 표석.

서귀포시 남원읍에서 4·3유적지를 나타내는 표지판을 따라 좁은 숲길을 따라 굽이굽이 걷다 보면 깨끗하게 정비된 3기의 봉분을 볼 수 있다. 바로 이 곳이 4·3 당시 국군에게 희생당한 희생자들이 안치된 곳이다.

남원읍 의귀리는 마을의 역사가 깊고 남원면 일대의 문화와 산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는 마을 사람들이 일본 유학을 많이 다녀오면서 개화사상과 평등의식, 민족의식을 갖추는 등 수준이 매우 높은 마을이었지만 4·3의 삭풍을 피하지는 못했다.

4·3 발발 초기만 해도 의귀리는 큰 피해가 없었지만 1948년 토벌대의 습격을 계기로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했다.

서귀포시에 무장대 습격이 이뤄진 1948117일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의귀리에 들이닥친 토벌대는 방화로 마을을 초토화시키는 한편 주민들을 학살했다.

이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주민들은 움막이나 숲 속의 동굴을 임시 피난처로 삼아 피난 생활을 했지만 토벌대 혹은 수색 중인 군인들에게 적발·학살되며 많은 피해를 입었다.

특히 19481226일 의귀국민학교에 군인들이 주둔하면서 주민 피해는 극에 달했다.

당시 학교에 주둔한 병력은 국군 제2연대 1대대 2중대로 설재련이 중대장을 맡아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다.

19481226일부터 1949120일까지 의귀국민학교에 주둔한 제2연대 1대대 2중대는 학교 주변에 4개 초소를 세우고 옥상에는 기관포를 설치했으며, 주위에는 모래주머니로 바리케이트를 만드는 등 학교건물을 요새화했다.

 

현재의 묘역으로 이장되기 전 옛 묘역에 세워졌던 현의합장묘 비석.
현재의 묘역으로 이장되기 전 옛 묘역에 세워졌던 현의합장묘 비석.

이어 수색활동을 통해 피난 생활을 하고 있는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학교 내에 수용하며 무차별 고문을 가했으며 1949110일과 11일에는 주민 20여 명을 학살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무장대는 학교에 수용된 주민들의 안위를 도모하고 토벌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1949112일 새벽 200여 명을 동원해 의귀초등학교를 습격했지만 이를 미리 파악한 2중대에 의해 51명의 사망자를 내고 패주하게 됐다.

이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무장대는 세력이 급격하게 약화되면서 이날 사건 이후 무장대가 마을을 습격하거나 경찰을 공격한 것은 있지만 군대를 직접 공격한 기록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이날 무장대 습격에 의해 군인도 4명이 희생됐는데 이에 군인들은 학교 내에 수용하고 있던 주민들이 무장대와 내통했다며 학교 동쪽 200m 지점으로 주민 60여 명을 끌고 가 집단 학살했다.

이렇게 군인들에게 학살당한 주민 80여 명은 제대로 수습도 이뤄지지 않아 결국 흙만 대충 덮은 채 방치됐다.

그러다 1년 후 마을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성을 쌓는데 매장지가 성 안에 들어가게 되면서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하게 됐는데 시신들이 서로 엉켜있어 구분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 미처 소식을 듣지 못했거나 시신을 수습할 가족이 없는 경우, 유족이 어려서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사례들이 있었기 때문에 상당수의 시신들은 결국 속칭 개탄물동쪽지역에 집단 매장됐다.

해당 집단매장지는 2003현의합장묘 4·3유족회에 의해 발굴됐는데 당시 숟가락과 비녀, 혁대, 총탄 등의 유물들과 함께 39구의 유해가 발굴했다.

이들 유해들은 화장을 거쳐 현재의 현의합장묘(의로운 영혼들이 함께 묻혀 있는 묘)’에 안장됐다.

 

양봉천 전 현의합장묘 4·3유족회장
양봉천 전 현의합장묘 4·3유족회장

양봉천 “DNA 감정으로 아버지 시신 확인 못한 것 아쉬워

현재 현의합장묘를 관리하며 이 곳을 방문하는 도민과 관광객들에게 4·3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는 4·3해설사를 담당하고 있는 양봉천 전 현의합장묘 4·3유족회장(71) 역시 4·3당시 부모님을 잃은 4·3유족이다.

양씨의 아버지도 현재 현의합장묘역에 조성된 3기의 봉분 아래 잠들어 있다.

당시 너무 어렸던 만큼 4·3 사건 자체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어렸을 때부터 친척 어른들과 함께 현재의 현의합장묘를 조성하기 전 구() 묘역을 관리해 왔다.

당시 큰아버지가 너의 아방은 저기 묻혔다고 말해주면서 양씨는 지속적으로 묘역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왔지만 해당 묘역은 양씨가 어른이 되고 군대를 다녀올 때까지 변변한 비석하나 제대로 세우지 못한 모습 그대로였다.

그렇게 옛 묘역을 보다 보니 제대로 묻지도 못한 묘에 아버지를 비롯한 희생자들을 그냥 놔두는 것보다 제대로 된 묘역을 조성해야 겠다고 생각하게 됐고, 그때부터 유족들을 결집시키기 시작했어요.”

의귀리는 물론 수망리와 토산리에 거주하고 있는 유족들에게 정월 11일마다 모이기로 하고 다달이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묘역 이장을 위한 기금을 거둔 것이다.

그렇게 모든 돈으로 1983년 현의합장묘 비석을 세웠고, 이후 경매로 나온 남원읍 수망리 신산모루인근의 현재 부지를 구입한 후 남제주군과 제주도의 도움을 받아 2003년 제대로 된 이장과 함께 현재의 현의합장묘역을 조성하게 됐다.

문제는 이장을 위해 묘역을 발굴할 당시였다. 사건발생 54년만인 2003916일 유해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39구의 유골은 발견됐지만 어린이를 비롯한 수많은 유골들은 너무 긴 세월이 흐르며 녹아버린 상태였다.

당시 정확한 시신 확인을 위해 DNA감정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자칫 잘못하다간 유족회가 갈라질 우려가 있어 결국 감정 없이 화장 후 합장을 하게 됐다.

양씨는 당시 DNA검사를 했다면 아마 아버지의 시신을 찾았을 지도 모른다. 그런 만큼 DNA검사를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하지만 이미 많은 시신들이 녹아버린 만큼 DNA감정을 할 경우 시신을 찾지 못하는 유족이 있을 수도 있고, 결국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어 이제 4·3이 많이 알려진 만큼 현의합장묘를 방문하는 이들도 늘었지만 걱정되는 것은 과연 우리가 이를 제대로 알려주고 있느냐는 것이다최근 4·3 70주년 운운 하지만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4·3이 어떤 사건인지 잘 모르고 흥미 위주로 슬쩍 지나치며 보는 것이 전부라고 한탄했다.

그러면서 얼마 전 역사교사들이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의 역사상황을 대비시키며 매우 구체적인 부분까지 물어보더라이렇게 4·3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만큼 학생들에게 4·3의 역사를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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