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영혼이 앞을 잘 볼 수 있도록 돌계단 낮게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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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조성된 무덤…석물 잘 갖춰
동녀석 두 기, 댕기 달고 있는 형태
등변사다리꼴 산담…美의식 반영
경사각 탓에 계단으로 균형 잡아
구좌읍 송당리에 있는 김계술 무덤 전경. 산담은 직사각형 모양이 아닌 등변사다리꼴 모양인데, 봉분의 모양이 용묘이기 때문이다.
구좌읍 송당리에 있는 김계술 무덤 전경. 산담은 직사각형 모양이 아닌 등변사다리꼴 모양인데, 봉분의 모양이 용묘이기 때문이다.

혼인은 가문을 일으키려는 것

김계술(金繼述)은 광산인으로 신라 왕자 김흥광(金興光)의 후예다. 고려 문정공(文正公) 김태현(金台鉉)12세손이다.

김태현의 아버지는 영광부사 김수(金須), 감찰어사를 거쳐 여러 차례 추증되어 문하시중이 되었다. 김수는 김태현이 10살 때 제주에 진을 친 삼별초 진압을 위해 탐라에 와서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

김계술은 문무를 겸비해 벼슬은 통덕랑(通德郞, 5)과 선략장군(宣略將軍, 4)에 이르렀다. 김계술의 아버지는 김치용(金致鎔)으로 명도암 김진용(金晉鎔, 1605~1663)의 동생이다.

김계술의 어머니는 군위 오씨로 김계술은 52녀 가운데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 중에 김계흥(金繼興, 1647~1701)은 숙종 때 문신(文臣)으로 전적(典籍, 6)을 지냈으며, 김계중(金繼重)은 숙종 36(1710)에 급제해 순조 때 정의현감을 역임했다.

김계술의 부인은 경주 김씨로, 산마감목관 김진혁(金振爀, 1637~1712)의 일곱 딸 가운데 큰 딸이며, 김계술과의 슬하에 42녀를 두었다.

김계술의 큰 아들은 진사(進士) 김인우(金仁雨)이고, 둘째 아들은 선략장군행충무위부사과(宣略將軍行忠武衛副司果)를 지낸 김혜우(金惠雨)이다. 셋째 아들은 어모장군(禦侮將軍) 김은우(金恩雨)이고 넷째 아들은 유향별감(留鄕別監) 김상우(金霜雨)이다.

김계술의 생몰 연대는 오래 세월 동안 풍상에 옛 비석이 마모돼 미상(未詳)이지만 사회적 상황으로 보아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살았다.

김계술의 장인은 경주인 김진혁(金振爀, 1637~1712)으로, 산마감목관 김사종(金嗣宗, 1615~1671)의 아들이자 자헌대부(資憲大夫) 김여(金礪)의 손자이다.

병와집(甁窩集)’, 김진혁은 병와 이형상이 1702년 제주목사가 돼 탐라를 순력 할 때 판관 이태현(李泰顯), 정의현감 박상하(朴尙夏), 대정현감 최동제(崔東濟)와 함께 당시 산마감목관으로서 동행하기도 했다.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산장구마(山場駒馬)’, 산마감목관 김진혁은 지방관들과 결책군(結柵軍), 목자(牧子, 말테우리), 보인(保人) 들과 함께 참여한 기록이 나온다.

김계술의 장모인 김진혁의 부인은 군위(軍威) 오씨(吳氏)로 벽사(장흥지방)찰방 오익위(吳益渭)의 딸이다. 김진혁과 군위 오씨 사이에 37녀를 두었는데 장남이 김시백(金時白)이고, 둘째 아들이 김시영(金時英), 셋째 아들은 김시택(金時澤)이다.

7녀 중 큰 딸은 무덤의 주인인 광산인(光山人) 김계술(金繼述)과 혼인한 후, 둘째 딸은 나주인(羅州人) 김천추(金千秋)에게, 셋째 딸은 선비 강세웅(姜世雄)에게, 넷째 딸은 나주인(羅州人) 김덕후(金德厚)에게, 다섯째 딸은 광산인(光山人) 김세황(金世黃)에게, 여섯째 딸은 김해인(金海人) 김취옥(金就)에게, 일곱째 딸은 선비 강세기(姜世基)에게 시집을 갔다.

전통적으로 혼인의 이념은 모름지기 두 성씨(姓氏)가 합쳐 위로는 종묘(또는 가문)의 일을 섬기고, 아래로는 후세를 잇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 옛 혼인은 오늘날처럼 개인 간의 사랑으로 맺어진다기보다 가문의 이해에 따라 두 가문의 합의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다.

명문가라는 것도 사실은 권력이나 재력을 유지하기 위해 혼인을 통해서 해당 집안의 번영과 영화(榮華)를 오래도록 누리고자 하는 노력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까 혼례의 목적은 집안을 건사(健事) 하고 안정적인 세습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혼인을 정하는 조건 중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먼저 가문을 따지는 것이다.

곧 그 집안의 배경이 사회적 진출을 쉽게 하기 위한 발판이 되기 때문이다.

혼인 관계를 잘 들여다보면 오늘날도 그 가문의 물리적이고 사회적인 힘을 바로 느낄 수 있다.

 

김계술 무덤의 석상들. 현무암으로 만들었다
김계술 무덤의 석상들. 현무암으로 만들었다

잘 갖춰진 석물

김계술의 장인이 당대 최고의 부자인 산마감목관이어서 그런지 석물이 잘 갖추어져 있고, 산담 또한 매우 크게 조성되었다.

석물은 봉분 앞 의자 모양으로 만들어진 혼유석을 비롯해 상석, 향로석, 계절석, 망주석, 동자석, 문인석 등이 있다.

구비(舊碑)는 땅속에 묻었고, 방부(方趺)의 좌대는 좌측 산담 위에 놓여있다. 좌측 올레는 정돌 없이 트여있고 올레 밖으로 두 층의 돌계단을 만들어 영혼이 오르내리기 쉽게 했다.

먼저 김계술 무덤의 동자석을 보면, 마주 보며 세운 두 기 모두 동녀석인데 머리 뒤편에 쪽을 틀고 댕기를 달았다.

좌측 동녀석은 전장 66, 너비 26, 두께 21로 손을 둥글게 모아 홀을 들고 있다. 우측 동녀석은 전장 61, 너비 25, 두께 25이고 손을 모으고 있지만 손가락 선이 새겨져 있다. 동녀석들은 조면암으로 만들어졌으며, 눈이 이중 양각으로 표현돼 있다.

문인석 2기 모두 기공이 많은 현무암으로 만들어졌는데, 복두를 쓰고 있으며 손을 모으고 예를 갖춘 자세로 서 있다. 좌측 문인석의 크기는 전장 95, 너비 31, 두께 28이고 손을 가슴으로 모아 배례하는 모습이다.

얼굴의 눈은 이중으로 돋을새김을 했다. 우측 문인석의 크기는 전장 112, 너비 32, 두께 28로 손을 모으고 있으면서 작은 홀을 들고 있다. 망주석은 좌측이 키가 131, 너비 26, 두께 25이고, 우측도 이와 비슷한 크기로 키가 128, 너비 33, 두께 24정도가 된다.

머리는 종형(鐘形) 모양에 몸체는 직사각형에 가까운 팔각기둥이다. 이 또한 문인석과 마찬가지로 구멍이 숭숭 난 현무암으로 만들었다.

김계술 무덤같이 동녀석이 두 기 모두 있는 경우는 초대 산마 감목관 김대길의 아들 김반(金磻)의 무덤과 김계술의 장인 김진혁의 무덤에서 보인다. 아마도 김진혁은 김반의 석상 제도를 본받았고, 김계술의 동녀석은 장인인 김진혁의 무덤 석상의 양식을 따른 것 같다.

계단식 산담

산담은 직사각형 모양이 아니다. 산담은 등변사다리꼴 모양인데 산담 앞과 뒤의 비율이 대개 1.21 정도, 혹은 1.31 정도가 된다.

산담이 그런 모양이 된 것은 산(봉분)의 모양이 용묘이기 때문이다.

용묘는 봉분 앞모양이 둥글고 뒤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형태여서 그 모양을 따라서 산담도 그렇게 형성된다. 이런 형태적 특성은 바로 민중의 미의식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형태와 선에 기교를 보태어 보는 사람에게 산담이 보기 좋으라고 한 경험 미학의 산물인 것이다.

김계술의 산담은 동산의 경사각 때문에 산담 측면 앞쪽으로 한 단계 더 계단을 만들어 무게 중심에 균형을 잡았다.

경사각대로 산담을 만들 경우 산담 앞쪽이 너무 높게 돼 망자가 전망을 볼 수 없게 되고, 그래서 산담 앞쪽은 더욱 낮게 돌을 쌓아 무덤의 영혼이 앉아서도 안산을 잘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필자는 예전에 이런 산담 모양을 제주 산담이라는 저서에서 계단식 산담이라고 불렀다.

이 계단식 산담은 능선의 기울기가 심할 때 만들어진 산담으로 특히 오름 산자락의 산담에서 쉽게 볼 수 있다. 평지에 조성된 산담에서는 계단식 산담을 볼 수 없는데 산담이 지형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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