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귀근(落葉歸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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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시발점이다.

오랜 기다림 뒤로 수많은 잎들이 움트고 날로 우거져 거대한 숲을 이룬다. 애진즉 번무가 꿈틀거린 자리다. 뿌리, 한 생명의 시원(始原)인 그것. 줄기와 잎과 가지, 그것들을 낳아 키운 어머니인 뿌리.

일엽지추(一葉知秋),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는 걸 보고 천지에 가을이 영ƒE을 안다고 했다. 봄엔 누구나 다 시인이 되고 가을엔 철학가가 돼 영탄을 터뜨린다. 이제 그 가을이다. 언제 이리 웅숭깊었나. 잠시 눈을 들어 만산홍엽의 저 산을 바라보라. 어느새 가을이 계절의 복판을 질러 한창 기울었다.

뜰 안의 낙엽수 앞에 걸음을 멈춘다. 슬그머니 다부숙한 토종 감나무 가지에 손을 얹는다. 이참이면 늘 그래 왔듯 말을 건넨다. 왜 잎을 내려놓느냐. 짧고 단조해진 가을인데 목전의 겨울을 발가벗어 어찌 나려 하느냐. 월동 준비는 다한 것이며 곧 들이닥칠 삭풍에 옷가지 하나 걸치지 않고 어쩌려느냐. 지난번 태풍 콩레이에 탱글탱글 하던 열매 몽땅 놓치고 잎까지 다 떨어뜨린 감나무에게 홀연 질문을 던진다.

지나는 건들바람에 빈 가지만 하늘댈 뿐. 녀석, 항다반사라 듯 일언반구 대답이 없다. 하지만 서른 해를 함께 섞어 온 정리인데 시종 침묵하진 않았으리. 스치는 바람결에 몇 낱말로 단문의 답을 내놓았을 법하다. 귀 기울이건대, ‘낙엽은 내 존재의 근원이다. 가을에 잎이 지는 건 자연스러운 것, 본래로 돌아가려는 것뿐’이라고. 아리송하나 새겨듣게 힘이 느껴지는 묵언의 음성이다. 행간으로 오는 의미가 심중하니 집중하려 한다. 녀석의 내 신뢰에 실망을 안겨 줘서야 될 일인가.

단 한 번도 거름을 주지 못했으니 영양실조는 아닐는지. 자목련, 단풍나무, 모과나무는 찢기고 구겨져도 그냥 달고 있는 잎을 다 내려놓았지 않나. 근력이 떨어진 걸지 모른다는 애틋한 내 눈길에도 아랑곳없이 심드렁하다. 눈만 반짝이고 있다. 눈 반짝이는 순간, 놓치지 않고 알아차렸다. ‘일찌감치 정리했노라.’고. ‘아, 그랬구나.’

떡갈나무나 단풍나무처럼 가을에 말라죽은 고엽을 그냥 매단 채 겨울을 나는 종도 있다. 해토머리, 새잎이 아린을 벗기 직전에야 해묵은 잎이 떨어진다. 겨울에 잎을 내려놓고 휴면상태에 들어 이뤄진 낙엽수 군락. 낙엽으로 선명하게 자태를 드러낸 나무가 밀집해 있는 지역의, 그 겨울 숲은 얼마나 음산할까. 그럴 게 뭐람. 질 때를 알아 지는 것도 덕인 걸.

낙엽수는 잎의 수명이 일 년이 채 안돼, 잎을 갖지 않는 계절이 있는 나무다. 달리 말해 갈잎나무, 상록수에 대립하는 낱말이다. 낙엽 때 이층(離層)이라는 특수한 세포층이 형성된 결과라 한다.

낙엽귀근(落葉歸根), 잎은 필경 뿌리로 돌아간다. 종당, 애초 제가 났거나 자란 곳으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낙엽수의 잎사귀는 봄에서 여름 지나 가을의 끝머리에 이르도록 똑 부러지게 자기소임에 충실했지 않나. 고단할 것이다. 이제 본향으로 돌아가게 놓아 줘야 한다. 낙엽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나무의 발을 감싸 줌으로써 겨울의 혹독한 얾을 막아 준다. 그뿐이랴. 썩어 문드러져 부엽토로 자양분이 된다. 이건 희생이 아닌, 자신의 어머니인 나무에 대한 되갚음이다. 자연의 이 작은 순리, 삶의 질서가 경이롭다.

낙엽은 자연의 섭리다. 속이 꽉 차고 영묘하다. 정녕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게 자연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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