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세월이 갈수록 태생적 뿌리를 찾는 애절한 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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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거세를 따른 좌명공신 지백호
신라 건국 도와 정씨성 하사받아
동래정씨 정항의 조부 군장 정문도
묘지 비석 임진왜란 때 파손돼 중수
경북 경주시에 있는 정씨 시조 지백호 봉분.
경북 경주시에 있는 정씨 시조 지백호 봉분.

인간사에서 중요한 큰일

사람이 만나 가정을 갖는 것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고 하여, 그것은 큰일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큰일이란 결혼과 상·장례를 일컫는 데 그만큼 사람 사는데 중요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결혼은 가정을 꾸려 가족의 기원이 되어 종족을 이루게 된다. 종족은 소위 혈족이라는 이름으로 민족이라는 사회적 단위로 확장되는 것이다.

·장례는 사람의 일생을 갈무리해주고, 그를 기억해주는 혈족사로서의 기본 역사가 되는 일이기 때문에 큰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은 기쁨의 꽃이라 하고 장례는 슬픔의 꽃이라 한다. 결국 사람이 여타의 짐승과 다른 것은 의례를 행해 기념성을 갖기 때문이며 자기의 문화를 이루어 민족문화를 계승하고 역사를 기록할 줄 알기 때문이다.

가족이든 왕조든 샘이 깊은 물뿌리 깊은 나무가 늘 상징이 되는 것은, 자기의 유구한 역사를 강조하기 위함이자 대를 잇는 역사를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다.

세상이 혼돈으로 치달아도 결국 자기의 부모를 그리워하며 찾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성 아닌가? 자기를 닮은 부모나 자식을 보며 행복한 때를 그리워하는 가족으로서의 사랑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인간이 어디 있을까.

동래정씨의 유래

고려시대 정씨들은 그들의 출신지를 흔히 영양(榮陽)이라고 표기했다. 영양(榮陽)은 중국 하남성(河南省)에 있던 현() 이름으로, 영양(榮陽) 정씨는 중국 전통사회에서 4() 중 하나였다(김용신, ‘고려묘지명집성’·2012).

동래는 지금의 부산광역시 김해군에 편입된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으로 경남 양산시 지역을 지칭한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거칠산국(居漆山國)으로 존속했다가 신라에 합병되었다. 서기 757(景德王 16) 전국에 9주를 두고 지명을 한자화할 때 동래군(東萊郡)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동래현(東萊縣)이 되었다가 1547(조선 명종 2)에 동래부(東萊府)로 승격됐다.

조선말기인 1885(고종 32)에 동래관찰부가 되었다가 이듬해 동래군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나 일제강점기인 1942년 대부분 부산부로 편입되었다.

이후 1957년에는 동래군마저 없어지고 부산시 동래구와 양산군 지역으로 편입됐다.

우리나라 동래정씨의 근원은 신라 유리왕 9(서기 32)에 신라 육부(6)의 하나인 취산진지촌(觜山珍支村)을 본피부(本彼部)로 개칭하고 그 부장(部長)에게 정씨성(鄭氏姓)을 하사하니, 이때부터 정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촌장이었던 지백호(智白虎)는 혁거세를 왕으로 받들어 신라 건국을 도운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고, 낙랑후(樂浪侯)로 봉해진 후 다시 감문왕(甘文王)으로 추봉(推捧) 되어 정씨의 비조(鼻祖)가 된다.

지백호 34세손 정회문(鄭會文)은 고려 때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역임했으며, 이전에는 이 정회문을 동래정씨 시조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4세인 문안공 정항(文安公 鄭沆)의 묘지석이 1656~1659년 사이 경기도 장단(長湍)에서 발견되었으며, 거기에 그 선대(先代)(아버지)는 정목(鄭穆)이고, 할아버지는 정문도(鄭文道)이며, 증조(曾祖)는 보윤호장공(甫尹戶長公) 정지원(鄭之遠)으로 3대까지만 지석에 기록돼 있어서 그 근거로 정지원을 1(一世)로 하고 후손들이 번성한 세거지인 동래(東萊)를 비로소 본관(本貫)으로 정하게 됐다(정수현, ‘동래의 맥’·1997).

 

동래부에서 6~7리, 부산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있는 정항의 할아버지 군장 정문도의 비석.
동래부에서 6~7리, 부산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있는 정항의 할아버지 군장 정문도의 비석.

정항의 묘비명과 정문도의 기록

참고로 정항의 묘지명(고려 인종 13·1137)을 소개해 보면, “공의 이름은 항()이며, 그 선조는 본래 동래군 사람이다.

아버지 목()은 섭대부정(攝大府卿)이고, 조부 문도와 증조 지원은 모두 동래군의 호장(戶長)이었다.

어머니 고씨(高氏)는 상당군부인(上黨君夫人)에 봉해졌는데, 검교장작감(檢校將作監) 익공(益恭)의 딸이다.

선친인 대부경은 네 아들을 두었으니, (), (), (), 막내인 공(:)이다. ()는 현달하지 못해 일찍 죽었지만, ()과 택()은 모두 문장과 재간으로 조정에 이름을 날렸다.

(:)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재빠르게 깨우치니 이미 무르익은 자와 같아서 선친이 가장 귀여워했다.

나이 23(고려 숙종 7·1102)에 진사에 급제하고, 숙종(肅宗)이 궁궐에서 복시(覆試)를 치르자 2등으로 뽑혔다. ()시국자감대사성(試國子監大司成, 당시 판사로 종3, 후에 성균감으로 고쳐 부르면서 정3품이 됨)이 되었다.”

정항(鄭沆)의 아버지 정목은 고려 전기의 문신으로 아버지는 군장(郡長) 정문도이며, 장인은 검교장작감(檢校) 고익공(高益恭)이다. 정목은 부인 고씨(高氏)와의 사이에서 네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정점(鄭漸정택(鄭澤정항 등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했다. 이 중 막내인 정항의 아들이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지은 정서(鄭敍, 鄭嗣文)이다. 정목은 본래 동래의 향리(鄕吏) 출신이다. 18세 때 개경(開京)에 올라와 유학해, 27세 되던 1066(문종 20)에 성균시에 합격했다. 이후 1072(문종 26)에 치러진 예부시(禮部試)의 복시(覆試)에서 병과(丙科)에 급제했다.

관직에 나아가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 군기주부(軍器注簿), 고주통판(高州通判)을 역임했다. 이후 영청현(永淸縣, 지금의 평안남도 평원군 영유면)의 수령이 되었는 데 마침 가뭄이 들자 토지를 개간해 백성들의 곤궁을 덜어주었고, ()의 봉책사(封冊使) 일행을 잘 접대했다. 그 공으로 접반사(接伴使) 소태보(邵台輔)의 추천으로 직사관(直史館)에 임명돼 선종실록(宣宗實錄)’을 편찬했다.

1093(선종 10)에는 동계(東界) 지역이 기근에 시달리자 ‘7주 춘하번 동북면병마판관 갑장별감 겸 선무(七州 春夏番 東北面兵馬判官 甲仗別監 兼宣撫)’가 되어 곡식을 풀어 백성들을 구제했다. 뒤에 금주(金州)의 수령이 되어서는 100여 위()의 신령(神靈)을 받드는 제사를 없애는 등 미신을 척결하기도 했다. 이후 감찰어사(監察御史),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기거랑(起居郞), 형부시랑(刑部侍郞), 예부시랑(禮部侍郞) 등 요직을 거쳤다. 검교예빈경 행섭대부경(檢校禮賓卿 行攝大府卿)으로서 1105(숙종 10)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정항의 할아버지 정문도에 대한 기록도 후대에 보인다.

동사록(?)’은 인조(仁祖) 2(1624) 820일부터 다음 해(1625) 326일 사이에 조선통신사(通信使) 일행이 일본에 갔다 돌아온 회답 부사(回答副使) 강홍중(姜弘重)의 수기(手記, 일기)인데 당시 정문도의 비석 이야기가 나온다.

“1624926일에 맑고 바람이 불었다. 부산에서 머물렀다. 조반 후 동래정씨 시조(東萊鄭氏始祖)의 묘를 찾아가 참배하는데, 본부(本府)에서 다례상(茶禮床)을 간략히 차려 제사를 지내게 했다. 묘는 동래부에서 6~7, 부산에서 10리 떨어져 있다. 묘 앞에 작은 비석(碑石)을 세워 동래정씨 시조 호장 정문도지묘(東萊鄭氏 始祖 戶長 鄭文道之墓)’라 새겨져 있었다. 이 비석은, 정지연(鄭芝衍)이 감사로 있을 때에 세웠다가, 임진왜란 때에 왜적에게 파손됐는데, 그 후 정사호(鄭賜湖)가 방백으로 와서 중수(重修)한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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