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바른 것을 얻고서 죽는다면, 또 무엇이 필요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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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제주 동래정씨 무덤…한라산 바라보는 형태
후손들의 오랜 노력으로 공적비·동자석 세우는 등 단장
제주시 봉개오름 남쪽에 있는 동래정씨 정윤강 부부의 무덤은 한라산을 바라보며 양지바른 곳에 있다. 부부의 무덤은 세월이 흐른 탓에 나지막해졌다.
제주시 봉개오름 남쪽에 있는 동래정씨 정윤강 부부의 무덤은 한라산을 바라보며 양지바른 곳에 있다. 부부의 무덤은 세월이 흐른 탓에 나지막해졌다.

동래정씨 애타는 후손들

보윤호장공(甫尹戶長公) 정지원(鄭之遠)1(一世)로 하는 동래정씨는 그의 12세손 정절(鄭節)에 이르러 예조참의를 역임했으니, 이때부터 동래정씨 참의공파를 이루게 되었다.

참의공 정절은 아버지가 양탁공(良度公) 정양생(鄭良生)으로 단성보리 찬화공신(端誠補理 贊化功臣) 중대광 봉원부원군(重大匡 蓬原府原君)이며 그의 넷째 아들이다.

정양생의 큰아들 정규(鄭規)는 문과에 급제해 병조전서(兵曺典書)를 지낸 청백리이다.

정규의 글이 동문선(東文選)’ 62권 서()병환 중에 자손들에게 명심하라는 글(病中 戒子孫 書)’이 수록되어 있다.

자식을 가르침에는 마땅히 의방(義方 : 가정 내에서 덕의에 맞게 교훈을 하는 것)으로써 해야 하며 어버이를 섬김에는 예를 얻는 것만 같음이 없으므로 이에 평시의 명령을 펴 의로운 자식들에게 훈계로 삼노라. 일찍이 세속의 어버이를 잃은 자를 보건대 성인이 예법을 제정한 근본 뜻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석씨(釋氏:석가모니)의 복받는다[薦福]는 근거 없는 말을 좇아 부질없이 7일의 재에 힘쓰고 과도하게 석 달을 섬기다 장사 지내고 있는데, 세상은 시대의 조류를 따라 깨닫지 못하고 사람은 무식해서 예절에 어두워 언행이 서툴러서 다투어 따르니, 예의가 밝지 않고 천하의 상도(常道)가 패퇴했도다. 내 그것을 근심한 지 오래이니 너희는 그것을 내게서 듣고 생각할지어다. 내 비록 나이는 오히려 많으니 질병이 끊이지 않음을 그 어찌하랴. , 어찌 이 세상에서 오래 살 수 있겠으며, 오직 서산에 임박한 것이 두려우니 금방이라도 일조의 변고가 생기거든 삼보(三寶)에 귀의(歸依) 하지 말고, 문공(文公)은 부작(不作)의 논()이 있어 천년[千載]에 인멸되지 않았고, 공자는 무위(無違)의 교훈을 남겨 만세에 망하지 않았으며 또 천당 지옥이 다름은 선과 악의 보복이라 하니, 이를 주장하는 자 반드시 사심이 없을 것이어늘 하물며 나의 평일에 한 일이 저들에 기쁘게 한 것이 없으니, 어찌 너희들의 일시(一時) 뇌물이 그 사이에 행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기()가 모이면 형상이 엉기고 성품이 갖추어지며, 기가 흩어지면 백()은 내려오고 혼()을 올라가나니, 이 이치는 매우 밝아 대저 사람이면 깨닫기 용이한 것인데 어떻게 이 세상에서 죽은 자가 저세상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겠는가. 삼가 너희에게 고하노니, 마땅히 내 명령을 들으라. 재물이 없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것은 어진이가 취하지 않는 것이요, 죽은 사람으로 해서 산 사람이 상하는 것은 성인이 경계한 바이니, 너희들은 지나치게 슬퍼하여 자기의 성명(性命)을 잃지 말 것이며 후하게 장사 지냄으로써 속임을 취하지 말 것이다. 풍수향배지설(風水向背之說)에 미혹되지 말 것이고, 금화금기지설(金火禁忌之說)을 따르지 말라. 다만 편안히 두는 것을 점칠 것이니, 어찌 화복(禍福)이 이에 관계되겠는가? 고금을 참작해 마땅함을 좇을 것이요. 유무에 알맞게 예를 행하거라. , 바른 것을 얻고서 죽는다면 내 또 무엇을 구하랴. ()가 아닌데 망녕되이 행함을 너희는 어찌 효라고 하겠는가. 이 명령을 폐지하지 말고 길이 후손에게 알리라.”

당시 타락한 부처의 법술(法術)과 풍수 점복(風水占卜)의 허망 됨을 꼬집고, 이에 현혹되지 말라는 성리학자의 경계심이 돋보이는 글이다.

정양생의 2남 정구(鄭矩)는 호는 설학제(雪壑齊), 시호는 정절공(靖節公)으로, 고려조 문과에 급제해 좌간의 대부(左諫議大夫)였으나 조선 개국 후 태종대에 이르러 좌찬성과 대제학을 제수됐으나 관직을 물리쳤다고 한다.

3남 정부(鄭府)는 문과에 급제해 부윤(府尹)이 되었으나 음악에 특출했다. 양탁공 정양생의 생졸 연대는 미상이며 배위는 순흥안씨이다.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된 정규의 글.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된 정규의 글.

동래정씨 제주 입도조

참의공 정절(鄭節)의 손()은 정질목(鄭秩睦)이며 정자야(鄭子若)의 차남이다.

정질목은 중훈대부보공장군(中訓大夫保功將軍)을 역임했고 조선 초 제주에 입도한 것으로 동래정씨 문중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1888무자보(戊子譜, 제주·어모공파 동시 수록)’, 1942임자보(任子譜)’, 1972참의공파보(參議公派譜)’를 편찬할 때까지도 제주 입도 중시조는 17세 중직대부 건공장군(中直大夫建功將軍) 정윤강(鄭允剛)으로 파보(派譜)에 기록됐으나 1991남평문씨 남제공파보(南平文氏 南濟公派譜)’, 동래정씨 15세 수위부위 정승순(修義副尉 鄭承順)의 배위(配位)가 남평 문씨 제주 입도조 11세가 되는 문미공(文斖恭)의 딸로서 정승순과의 슬하에 정맹명(鄭孟明)과 현신교위(顯信校尉) 정중명(鄭重明)을 두었다는 기록을 찾게 됨으로써 동래정씨 입도 중시조를 14세 정질목으로 바로잡는 계기가 되었다.

동래정씨 입도 15세 정승순, 정옥문(鄭玉文; 후에 정윤강의 차자(次子)였으나 정질목의 차자로 바로 잡음), 16세 정맹명과 정중명, 정건(鄭建) 등의 묘소는 찾을 수 없어 후손들이 이를 매우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동래정씨 12세손 정규의 단호한 목소리는 오늘날에도 동래정씨 집안에 쟁쟁하게 심금을 울리고 있다. “죽은 사람으로 해서 산 사람이 상하는 것은 성인(聖人)이 경계한 바이니, 너희들은 지나치게 슬퍼하여 자기의 성명(性命)을 잃지 말라.”

현재 제주도 동래정씨의 무덤 중 가장 오래된 무덤은 정윤강과 정형창의 무덤인데 정윤강은 정중명의 둘째 아들로 형 정윤견(鄭允堅)이 있었으나 형의 묘소는 전하지 않으며, 조부는 정승순, 증조는 정질목이다. 정형창은 정건의 아들이고, 조부는 정옥문이며, 증조는 정질목이다. 그러니까 정윤강과 정형창은 사촌 형제가 된다.

 

1981년 제주의 마지막 동자석 장인 고흥옥이 만든 동자석.
1981년 제주의 마지막 동자석 장인 고흥옥이 만든 동자석.

정윤강의 무덤

정윤강의 무덤은 현재 제주시 봉개동에 있는 봉개오름 남쪽 한라산을 바라보며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다.

벼슬은 중직대부 건공장군(中直大夫 建功將軍)이고 배()는 경주김씨이다.

부부의 무덤은 세월이 흘러 나지막해졌다. 묘역에 세워진 공적비로 보아 정윤강 묘역의 단장(端裝)1967년에, 그리고 1981년 두 차례에 걸쳐 후손들이 노력한 결과 오늘에 이른다. 정윤강 부부 무덤의 묘역과 동자석은 1981년에 묘역을 조성할 때 만든 동자석이다.

이 동자석은 양식으로 보아, 만든 사람은 제주의 마지막 동자석 장인 고흥옥(1921~2007) 선생인데 아명은 고선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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