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끝자락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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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창구, 시인·수필가·前 애월문학회장

해질녘이 가까워서일까. 산 정상에서 아흔아홉골을 따라 천왕사까지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매섭다. 밤과 낮의 일교차가 제법 큰 날들이 지속되는 걸 보니 가을도 끝자락을 향해 가고, 겨울이 가까이에 있음을 실감한다.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가지 사이사이 쏟아지는 햇살의 눈부심이 다행히 스며드는 한기를 잠재우고 있다. 비룡선사에 의해 창건 된 천왕사는 병풍처럼 에워싼 둘레산에 세존바위 보살바위 등 기묘한 바위들이 신비스럽게 솟아 있고 홍송의 향기가 속세의 번뇌를 말끔히 씻어주는 듯하다. 울창한 산림의 계곡에 자리한 천왕사는 도내에서 유일하게 고즈넉한 산사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사찰 주변은 벌써 가을의 끝자락, 다가올 겨울 채비에 여념이 없다.

주변 계곡을 붉게 물들인 나뭇잎은 막바지 가을을 말이라도 해주는 냥 붉음을 지나 차라리 빈티지(Vintage) 스러운 흙색으로 변해가고 있다. 천왕사 대웅전 뒤쪽 산 바위 전망대에 올라 가을의 정취에 빠져 본다. 멀리 일렁이는 억새의 물결과 산사 앞을 지나는 가족의 밝은 모습이 어우러진 늦가을의 풍경 속에 떠나가는 가을을 배웅하는 이들의 행복이 묻어나는 모습에서 나 역시 잠시나마 따스한 행복을 느껴본다. 경내를 거니고 있는 내방객은 올가을의 행복한 추억을 가슴속에 하나, 둘, 저장하는 모습이다. 행복한 추억은 힘든 삶을 이겨나가는 생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계절에 취해 낭만의 여유를 만끽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그런 사소한 여유조차 사치스레 느껴지는 우리 사회의 빈곤계층과 젊은 청춘들이 있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부가 1년 6개월이 넘었지만 여전히 빈부격차는 더 커지고, 소득주도성장 정책에도 소비심리가 얼어붙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우리 주식시장은 외국인 순매도가 늘고 코스피 2000선이 붕괴되는 등 경제가 불안하다. 공공기관 채용비리 소식에 빽없는 흙수저들은 허탈감과 분노 속에서, 취업난에 허덕이는 청춘세대들은 자신을 뒤돌아 볼 마음의 여유조차 없는 것 같다.

이맘쯤이면 대학가도 예외가 아니다. 서로의 갈 길을 찾아 고민하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청춘들을 생각하면 맘 한 구석이 늘 싸늘해진다. 모두가 노력하고 준비한 만큼 결실이 그들에게 축복으로 다가왔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경쟁과 서열에 내몰린 그들에게 필연적으로 누군가는 눈물을 삼켜야 하고 소외되는 아픔 겪을 수밖에 없다. 법당 부처님 앞에 촛불을 켜고 합장하여 엎드려 수 없이 절하는 저 어머님들의 모습에 그 간절함을 엿볼 수가 있다. 필자 역시 지금의 아픈 계절을 보내는 청춘들에게 어린 날의 꿈과 열망이 차갑게 식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열심히 준비했으니 모두에게 그만큼의 결과가 따라왔으면 하는 간절함으로 부서진 꿈과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주고 싶고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당부와 격려를 보내고 싶다.

아울러 취업난에 아파하고 간절한 청춘들에게 원하는 결실을 맺어 시린 겨울이 아니라 따뜻하기를, 그리고 책 한 권, 시집 한 권만이라도 읽어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하루하루 어렵게 버티는 우리의 이웃에게도 따뜻한 온정과 부처의 자비로 행복한 날로 바뀌게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간절한 산사의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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