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부부의 곁을 지키던 잃어버린 동자석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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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당 훈련원판관 고세정 부부 합묘…우백호, 당오름이 고즈넉이 기운 모으는 형태
2017년 봄 이후 동자석 2기 도난…제주지역 무덤 원형 잘 알 수 있어 ‘회수 절실’
2017년 2월에 촬영한 송당리에 있는 훈련원판관 고세정 부부 합묘 전경. 이때까지 동자석 2기가 제자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빨간색 동그라미 표시된 부분이 도굴된 동자석의 위치.
2017년 2월에 촬영한 송당리에 있는 훈련원판관 고세정 부부 합묘 전경. 이때까지 동자석 2기가 제자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빨간색 동그라미 표시된 부분이 도굴된 동자석의 위치.

겨울이 점점 무르익어갈수록 날씨도 흐린 날이 많아지고 싸늘한 기운마저 땅으로 내린다.

오며 가며 들르는 송당의 무덤이 세상의 하수상한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주변의 을씨년스러운 바람에 댓가지만 흔들거리는 것을 바라보며 또 한 해를 보내고 있다.

묘비는 전형적인 제주식 비석으로 여절교위수 훈련원판관(勵節校尉守 訓鍊院判官), 의인강씨 지묘(宜人姜氏 之墓)에서 안산(案山)을 바라보니 둔지오름이 한눈에 들어오고, 좌청룡은 체오름이 가매옥으로 이어지고, 우백호는 당오름이 고즈넉하게 기운을 모아주는 형국이다.

공의 이름은 고세정(高世鼎)이며 출생은 숭정기원후 3(崇禎紀元後三) 신묘년(辛卯年, 1831)에 태어나 향년 78세를 살았다.

비석은 43 때 좌측이 총탄을 두 발 맞아 훼손되었고 앝게 판 비석 글씨의 각에 이끼가 끼었다. 서촌보다 동촌이 비가 많이 온다는 것을 실감한다.

행수법(行守法)

묘비에 새겨진 공의 벼슬은 여절교위수 훈련원판관으로, 두 개의 벼슬의 품계가 같이 쓰이고 있다.

여절교위 품계는 종6품이고 훈련원판관은 종5품인데 이때 행수법(行守法)이 사용되고 있다.

이 행수법에 따르면, 벼슬마다 그것의 품계가 일정하게 정해져 있으나, 경우에 따라서 어떤 벼슬에는 그 벼슬의 품계보다 더 높은 품계의 관원(官員) 또는 반대로 더 낮은 품계의 관원을 임명할 수 있다.

그래서 품계가 높은 사람을 낮은 벼슬에 임명하는 계고직비(階高職卑)의 경우를 ()’이라 하고, 반대로 품계가 낮은 사람을 높은 벼슬에 임명하는 계비직고(階卑職高)의 경우를 ()’라고 한다.

이 무덤의 주인 고세정은 벼슬이 판관보다 낮은 여절교위라는 종 6품 벼슬에서, 5품인 판관으로 임명되었기에 라고 쓰인 것이다.

원래 이 행수법은 중국 당나라 이후에 사용했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사용했는데 조선에서는 1442(세종 24) 처음으로 사용하고, 뒤에 가서 경국대전에 따라 법제화됐다.

여절교위(勵節校尉)는 조선시대 종6품 서반(西班:武官)에게 주던 품계로, 조선이 건국된 직후인 1392(태조 1) 7월 종6품의 상위 직급은 승의교위(承義校尉), 그 밑 직급은 수의교위(修義校尉)로 정했다.

그런데 이 무산계의 승의교위(承義校尉)1466(세조 12) 1월에 여절교위(勵節校尉), 수의교위는 병절교위(秉節校尉)로 개칭되어 경국대전에 수록됐다.

동반(東班)과 서반(西班)을 양반이라고 하는데 문반(文班, 문관)과 무반(武班, 무관)으로 통용되면서 사용됐지만, 이는 임금을 배알하거나 크고 작은 조회(朝會)에 참여자가 위치한 반열(班列)에 의한 구분으로 직위와 품계를 따지는 것이다.

또 직급에는 정직(正職)과 겸직(兼職)이 있고, 실직(實職)과 허직(虛職)이 있는데 관직자의 직무 하는 일에 따른다.

다시 말해서 실직에는 정직과 겸직이 있었고, 허직에는 겸교(檢校)동정(同正)첨설(添設)영직(影職)과 봉조하(奉朝賀)노인직(老人職) 등이 있었다.

조선 개국과 함께 실직과 허직은 경관직(京官職)과 외관직(外官職) 5900여 개의 문관·무관의 정직(正職)과 겸직(兼職)을 설치하고 내시부(內侍府)와 검교직(檢校職) 등을 운영하면서정착됐다.

실직은 성종 15년까지, 정직(正職)은 영의정 등 이하 5551여 개 경관직과 외관직의 문무직이, 겸직은 승문원 도제조(承文院都提調) 등 이하 588개 경관직과 외관직으로 정립됐다.

허직은 겸교(檢校)동정(同正)첨설(添設)직은 관제 정비, 녹봉(월급) 절약, 군역자(軍役者)와 국역자(國役者) 등에 대한 우대, 경로사상 등과 관련되면서 세종대에 혁파됐으나 이후 새롭게 무정수(無定數)의 영직(影職)奉朝賀노인직이 설치돼 운영됐다(한충희, 2008: 58~59).

특히 노인직, 혹은 노직(老職)1443(세종 23) 이전에 80세 이상된 양(() 노인에게 관직(官職)과 품계(品階)를 수여하면서 비롯됐고, 이후 성종 대까지 관계(官階)를 수여하거나 가자(加資)라는 것으로 개정하면서 정립됐다.

제주 무덤에 다양한 벼슬과 품계가 많은 것은 노인직이 많고, 진상 등 군역자와 국역자가 많은 까닭도 있다.

부부 합묘

여절교위수 훈련원판관, 의인강씨 지묘는 비석에서 보는 바처럼 부부가 한 무덤에 함께 영면한 것을 합묘(合墓)라고 하는데, 이를 합장(合葬), 또는 부장(祔葬)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합장은 둘 이상 여럿이 묻는 무덤을 말할 때도 한다. 합묘는 이미 조성된 남편 또는 부인의 묘에 합장할 수 없다.

부부 한 사람이 먼저 돌아갈 경우 같은 묘역에 단묘를 조성한 후에 나중에 부인이 돌아가면 옆에 다시 단묘를 만들어 쌍묘로 조성할 수는 있어도 이미 만들어진 한 무덤의 광에 부장(祔葬)을 할 수 없는 것이다.

합장하는 방법은 합묘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시 묘자리를 정하고[求山] 부부의 키가 다르기 때문에 머리 쪽을 기준으로 삼아 키를 맞춘다.

본부인[初娶]만 남편과 합장할 수 있으며, 재취(再娶)와는 합장하지 못한다.

부부 합장 시에는 관과 관 사이에 구멍을 뚫어 서로의 기운이 통하게 한다.

이런 합장의 시작은 공자의 말에 근거한다. “위나라 사람의 부장(祔葬)은 중간에 간격을 두었고, 노나라 사람의 부장(祔葬)은 합쳤으니, 합친 것이 옳다.”라고 하였으며, ‘시경(詩經)’, “살아서는 집을 달리했거니와 죽어서는 구덩이에 함께 묻히리도다.”라는 말은, 합장이기도 하지만 쌍묘로 같은 묘역에 묻힌다는 뜻이기도 하다.

부부가 합장할 때나 쌍묘로 조성할 때 부부가 서로 묻히는 위치에 대해 주자가례에 의하면, 부부가 합장하는 위치를 묻자 주자가 말했다. “내가 이전에 죽은 아내를 장사 지낼 때 동쪽 지경의 한자리를 남겨놓고, 또한 일찍이 예법이 어떤지는 상고(詳考) 하지 않았다. 진안경(陳安卿)지도(地道)는 오른쪽을 높이니 남자가 마땅히 오른쪽에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여 제사 때 상석(上席)을 삼으니 장사지낼 때도 또한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옳다라고 했다.

사람이 살아있을 때는 좌상우하(左上右下)가 되고, 즉 좌가 남자이고 우가 여자인데, 죽으면 남녀가 우상좌우(右上左右)로 바뀌는 것이 동양의 시각이다.

잘 보면, 비문(碑文)이나 지방(紙榜)의 차례가 우상좌우(右上左右), 즉 오른쪽(서쪽)은 남자, 왼쪽(동쪽)은 여자가 된다.

 

2017년 2월 이후 도굴된 좌측 동자석의 모습.
2017년 2월 이후 도굴된 좌측 동자석의 모습.
도굴된 우측 동자석의 모습.
도굴된 우측 동자석의 모습.

도난 당한 동자석 찾습니다

여절교위수 훈련원판관, 의인강씨 지묘의 동자석도 20172월 이후 도난됐다.

원래 이 무덤은 숲에 가려서 잘 알 수가 없었으나 밭을 개간하며 나무를 베어내면서 도로변에서 잘 볼 수 있게 노출되었다.

그 후 2년이 지나자 동자석 2기가 도난 당했다.

그곳의 석물은 동자석 2, 문인석 2, 망주석 2, 토신단, 상석, 혼유석과 혼백이 앉는 의자 등 골고루 갖추어져 있어서 제주의 무덤 원형을 잘 알 수 있었으나 지금은 안타깝게도 그것이 훼손된 것이다.

잃어버린 동자석의 크기는 좌측 전장 68m, 너비 26cm, 두께 19cm, 우측 전장 68m, 너비 23cm, 두께 19cm이고 일명 속돌이라고 하는 송이석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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